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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憲
(? ~ 280년 3월 20일)
1. 개요
삼국시대의 손오의 무장이다. 유찬의 손자이자 유평의 장남으로 양주 회계군 장산현 사람이다.2. 정사 삼국지
아버지 유평이 손호에게 숙청된 뒤에도 무창감(武昌監), 진군장군(鎭軍將軍)[1] 등의 고위 무관직을 역임했다.[2]279년 두예에게 격파된 서릉독(西陵督) 장정이 두예의 반간계(反間計)로 인해 손호의 의심을 받아 수도로 소환되자, 그를 대체하여 서릉독이 되었다.[3]
280년 진나라가 침공해오자 유헌은 그의 임지인 서릉을 지켰으나, 왕준에게 패배하여 정남장군(征南將軍) 성거(成璩)[4], 서릉감(西陵監) 정광(鄭廣), 영수군독(領水軍督) 종리순(鐘離徇)[5] 등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6]
3. 삼국지연의
할아버지 유찬, 아버지 유평과는 달리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아버지 유평이 죽을 때 삼족이 멸하여졌다는 표현이 등장하므로, 유헌을 등장시키는 것 자체가 소설의 오류가 되어 등장하지 않은 듯 하다. 아니면 작가가 유헌의 존재를 몰랐거나 무시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의 동생인 유려도 마찬가지로 등장하지 않는다.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삼국전투기에서 도준의 관직이 유헌이 역임한 관직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두 사람의 임지가 모두 서릉으로 읽히기에 생긴 오류인 듯 하다. 도준의 관직은 서릉독(徐陵督)으로, 그의 임지인 서릉은 오의 수도 건업과 가까운 곳이며, 도준은 손호에게 중앙군 7천을 할당받고 곽마를 토벌하러 간 것이지 형주 방면에서 수비병을 차출하여 간 것이 아니기에 도준의 차출로 인해 형주의 수비가 텅 비었다는 고증 오류가 발생하게 되었다. 다만 왕준에게 수비가 허망하게 돌파당한 것은 실제와 같다.[1] 『진서(晉書)』 「왕혼등전(王渾等傳)」에 수록된 왕준의 열전에서는 그의 관직이 진남장군(鎭南將軍)으로 나오나,「무제기(武帝紀)」에서는 진군장군으로 나온다. 또한, 유헌과 같이 서릉에서 전사한 장수들 중에서 유헌보다 위계가 더 높은 정남장군 성거라는 인물이 확인되는데, 사방장군 체제에서는 방위 구역이 같을 경우 사정장군(四征將軍)과 사진장군(四鎭將軍)을 해당 방위 구역에 같이 두지 않는 것이 원칙(예컨대 해당 방위구역을 담당하는 정남장군이 이미 있을 경우 진남장군을 두지 않는다.)이므로 이에 따라 유헌의 관직을 진군장군으로 표기한다.[2] 아버지 유평이 숙청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헌이 이처럼 고위직을 역임한 것을 보면 손호가 유평의 가문까지 완전히 숙청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3] 이로써 유헌의 직책은 20년 전에 육항이 지냈던 직책과 완전히 같아지게 된다.[4] 단순히 관직으로만 따지면 이 인물이 유헌보다 위계가 높지만, 서릉의 군대를 총괄하는 직책은 유헌이 맡고 있었으므로 실질적인 최고지휘관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5] 종리목의 막내아들이다.[6] 이 시점에서 왕준의 군세는 5만 명 이상의 대군이었으나, 서릉에 주둔하고 있던 고위급 장교들이 오나라 영토에 속한 형주의 다른 수비지역들보다 유독 많았던 점을 보면 서릉은 최소한 오나라의 영토에 속해 있는 형주의 다른 거점들보다도 가장 집중적인 방어 체계가 구성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이 당시에 서릉의 수비병이 얼마나 되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실제로 육항이 죽기 전에 통솔했던 서릉의 수비병이 3만여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손호가 서릉의 수비병을 늘려야 한다는 육항의 유언을 무시했다고 하더라도 이 시점에도 3만 명과 비슷한 수준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왕준이 첫 공격거점인 단양(丹陽, 자귀현(秭歸縣)의 남동부 지역)을 무너뜨리고 오언이 설치해둔 장애물을 돌파한 뒤[7] 불과 이틀도 지나지 않아서 서릉이 함락된 것을 볼 때, 유헌은 군을 지휘하는 데 있어서 전임자들보다 무능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