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윌리엄 더글러스 William Douglas |
별명 | 르 하디(le Hardi, 용맹한 자) |
출생 | 1243년경 |
스코틀랜드 왕국 사우스래너크셔 더글러스 | |
사망 | 1298년 1월 24일 |
잉글랜드 왕국 런던 탑 | |
아버지 | 제2대 더글러스 영주 윌리엄 2세 '롱레그' |
어머니 | 바타이유의 콩스탕스 |
형제 | 휴, 윌렘마 |
배우자 |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엘레노어 드 루뱅 |
자녀 | 제임스, 휴, 아치볼드 더글러스 |
직위 | 제3대 더글러스 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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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의 귀족.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존 발리올의 편에 서서 에드워드 1세와 대적했다가 런던 탑에서 옥사했다.2. 생애
일부 학자들은 더글러스 가문의 조상이 말 콜룸 4세 치세 때 클라이드 강 상류에 정착한 플랑드르인이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더글러스 영주는 윌리엄 1세 더글러스로, 모레이의 지주였던 케르데일의 프레스킨의 형제 또는 처남이었다. 그는 1177년 이전에 더글러스 워터 계곡을 영지로 받았다. 더글러스 가문은 윌리엄 1세의 두 손자로부터 두 갈래로 나뉘었다. 윌리엄 2세 더글러스 '롱레그'는 윌리엄 1세의 차남 앤드류로부터 가문의 영지와 더글러스 영주의 작위를 물려받았으며, 이중에서 로디언 또는 달키스의 더글러스 가문이 탄생했고, 나중에는 모튼 백작을 겸임했다.윌리엄 3세 더글러스 '르 하디'는 1243년경 윌리엄 2세 더글러스 '롱레그'와 바타이유 출신으로 알려진 콩스탕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휴(1289년 이전 사망), 빌렐마[1]가 있었다. 그가 기록상에 처음 언급되는 건 1256년으로, 당시 잉글랜드의 뉴캐슬어폰타인에서 열린 재판에 연루되었다. 아버지 윌리엄 2세는 결혼을 통해 노섬벌랜드의 포든 영지를 소유했는데, 그는 자파슈카라는 인물의 중재 하에 워든에 있는 땅을 그에게 줬다. 그러나 포든의 영주인 앵거스 백작 길버트 3세 드 움프라빌이 윌리엄 2세가 임대료를 내지 않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윌리엄 2세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길버트는 포든을 공격해 윌리엄 2세를 하보틀 성에 가뒀다. 그는 아버지를 잡아가는 자들과 맞서 싸우다 부상을 입었다. 길버트와 윌리엄 2세는 나중에 화해했고, 윌리엄 2세는 무사히 풀려났다.
1274년 아버지 윌리엄 2세가 사망한 뒤, 휴가 가문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휴는 1259년 4월 5일 마조리 애버네시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하고 1289년 이전에 사망했고, 윌리엄 르 하디가 가문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그가 물려받은 영지는 록스버그셔의 모어배틀, 덤프리스셔의 커칸드루스, 부컨의 랫트레이 및 크리몬드, 킨카딘셔의 컨버트, 리데스데일 등지였다. 1288년, 스코샤의 판사인 페티의 앤드류 모레이는 섭정 위원회의 6인 중 한 명인 파이프 백작 던컨의 살인 사건에 열루된 휴 드 애버네시를 윌리엄 르 하디에게 넘겼다. 윌리엄은 휴를 더글러스 성에 가뒀고, 에드워드 1세가 그를 풀어주려고 시도했지만 무위에 그치고 1291년에 옥사했다.
한편, 윌리엄 르 하디는 1288년에 존 위샤트와 협력하여 애시비의 라 주슈 남작인 앨런 드 라 주슈의 소유였던 피사이드 성을 공격했다. 앨런의 아내가 당시 성에 있었고, 그로비의 기사 윌리엄 페러스의 미망인인 엘레노어 드 루뱅도 성에 있었다. 엘레노어는 루뱅 백작 고트프리트 3세의 막내아들 고트프리트의 증손녀로, 에드워드 1세는 엘리노어가 결혼할 때 상당한 지참금을 줬다. 그녀의 소유물에는 스코틀랜드 영지도 포함됐는데, 임대료를 받기 위해 피사이드 성을 들렀다가 윌리엄 르 하디의 공격을 받았다. 최근에 아내와 이별한 윌리엄 르 하디는 이 순간을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엘레노어를 납치하여 더글러스 성으로 데려갔다.
엘레노어의 납치는 에드워드 1세에게 극심한 불쾌감을 안겨줬다. 그는 노섬벌랜드의 셰리프에게 잉글랜드에 있는 윌리엄 더글러스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라고 명령했고, 또한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를 대신해 스코틀랜드를 다스리던 섭정 위원회에게 윌리엄을 체포하고 엘레노어를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섭정단은 이 요청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섭정단의 일원 중에는 스코틀랜드의 대시종장 제임스 스튜어트와 부컨 백작 알렉산더 코민이 있었는데, 제임스 스튜러트는 윌리엄 르 하디의 첫번째 아내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형제였고, 알렉산더 코민은 엘레노어의 매제였다. 그러나 1290년 초, 윌리엄은 에드워드 1세에게 체포되어 나레스버러 성에 감금되었다. 그 해 봄, 엘레노어가 남편을 위해 에드워드에게 보석금을 보냈고, 윌리엄은 곧 풀려났다. 에드워드 1세는 나중에 윌리엄의 잉글랜드 영지를 돌려줬지만, 그 대가로 에식스와 헤리퍼드셔에 있는 엘레노어의 일부 영지를 왕실 영지로 삼았다.
1290년, 윌리엄은 스코틀랜드의 유아 여왕 마르그레트와 에드워드 1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왕자 사이의 결혼을 약속한 솔즈베리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1290년 가을 마르그레트가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이동하다가 오크니 제도에서 심한 뱃멀미로 인해 병사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을 놓고 총 14명이 대립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들의 대립을 중재하고 새 국왕을 지명하는 역할을 스코틀랜드 의회로부터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윌리엄과의 사이가 나빠지자 1291년 말 그의 모든 잉글랜드 영지를 몰수한 뒤 자기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보내 그곳들을 관리하게 했다.
1292년 11월 17일, 에드워드 1세는 존 발리올을 스코를랜드의 왕으로 선포하는 법령했다. 새로운 왕은 1293년 2월 10일에 의회를 소집햇다. 그러나 일부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의회 참석을 거부했다. 여기에는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 군도 왕국의 영주 알렉산더, 케이스네스 백작 존, 그리고 윌리엄 르 하디가 포함되었다. 윌리엄은 나중에 왕이 소집한 2번째 의회에 참석했지만 체포되어 투옥된 뒤, 막대한 벌금을 내고서야 풀려났다.
1295년, 존 발리올과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의 끊임없는 간섭에 불만을 품고 프랑스, 노르웨이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윌리엄 르 하디는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 중심지 중 하나인 베릭의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1296년 3월,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베릭을 포위 공격한 끝에 수 시간 만에 함락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윌리엄은 수비대를 이끌고 용감하게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밀리자 결국 항복했다. 에드워드 1세는 수비대를 풀어줬지만, 윌리엄을 베릭 성의 멧돼지 탑에 감금했다. 여기에 그의 두 살된 아들 휴는 에식스 지방의 보안관에게 맡겨졌다. 그는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에드워드 1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받들겠다는 충성 서약을 한 후에야 풀려났다. 하지만 윌리엄의 노섬벌랜드에 있는 영지는 반환되지 않았고, 오랜 라이벌인 길버트 3세 드 움프라빌에게 양도되었다.
1297년, 윌리엄은 윌리엄 월레스, 앤드류 모레이의 반란에 호응해 스코틀랜드 반란에 가담했다. 그러나 1297년 7월 잉글랜드군에 체포되어 베릭 성에 감금되었다. 그가 거주하던 탑은 일명 '멧돼지 탑'으로 불렸는데, 나중에 '더글러스 탑'으로 명명되었다. 이후 런던으로 이송되어 런던 탑에 감금되었고, 1298년 1월 24일에 옥사했다.
3. 가족
-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 1288년 이전): 제4대 스코틀랜드 대시종장 알렉산더 스튜어트의 딸.
- 제임스 '블랙' 더글러스(1286 ~ 1330): 제5대 더글러스 영주. 로버트 1세의 최측근으로,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맹활약해 조국의 독립에 크게 공헌했다.
- 엘레노어 드 루뱅(? ~ 1326년 5월 3일 이후): 리틀 이스튼의 기사 매튜 드 루뱅의 딸.
- 휴 더글러스(1294 ~ 1347): 제7대 더글러스 영주.
- 아치볼드 더글러스(1298년 이전 ~ 1333): 1333년 4월부터 스코틀랜드의 호국경이자 리데스데일의 영주.
[1] ? ~ 1302, 윌리엄 갈브레이스 경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