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21 16:27:16

왕흘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왕의"는 여기로 리다이렉트됩니다. 중국 외교부장 王毅에 대한 내용은 왕이(외교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王訖
(? ~ 기원전 244년)

1. 개요2. 생애3. 창작물에서
3.1. 하라 야스히사만화 킹덤에서의 묘사3.2. 만화 《달인전 ~9만리를 바람에 타고~》3.3.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1. 개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장군으로, 이 인물의 이름에 대한 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 책마다 '왕흘'(王齕) 또는 '왕의'(王齮)로 표기된다.

2. 생애

진 소양왕(秦昭陽王) 47년에 좌서장(左庶長)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한나라를 공격하여 상당군(上黨郡)을 점령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조나라의 피뢰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후에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정벌하러 갔지만, 조나라에서 파견된 조사의 구원군에 크게 털렸다.

기원전 262년에 조나라에 출병하는 오대부 왕릉이 싸움을 잘하지 못하자 총사령관으로 교체되면서 출전하게 되고 염파와 대치해 세 번의 전초전에서 승리했지만 이것은 장기전으로 끌고가려는 염파의 작전이었다. 왕흘은 이것에 속아 2년간이나 염파를 뚫지 못해 패퇴할 위기에 처했다. 결국 여기서 지면 이 전쟁을 명령한 자신의 정치생명은 끝장날 것이라 판단한 진나라의 승상 범수는 자신의 정적이자 당시 중화 최강의 장수인 무안군 백기로 사령관을 교체했다. 물론 왕흘은 완전히 전선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부사령관이 된 것이고, 백기가 총사령관이 된 것. 자세한 내용은 장평대전항목을 참고바람.

장평대전에서의 대승 후, 조나라로 재차 출병하라는 무안군 백기가 거절 끝에 숙청되자, 왕흘이 대신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공격한다. 그러나 조나라의 명장염파에게 대파되고, 이 일로 인해 대장의 직위에서 파면되었다.

이후 기원전 247년에 상당을 함락하면서 태원군을 설치하게 되며 진시황 원년인 기원전 246년에는 장군이 되었다가 2년 후, 기원전 244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열국지》에서는 적군과 대치하던 중에 여러번 패배한 자신을 용서해준 진나라 왕에게 죄를 갚겠다며 1,0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돌격하며 사망한다. 그 돌격으로 인해 적진에는 혼란이 일었고, 그 전투는 진나라가 승리했다고 한다. 이때가 진시황시기 3년.[1]

3. 창작물에서

3.1. 하라 야스히사만화 킹덤에서의 묘사

원래 왕의는 한명의 인물이지만, 여기서는 어쩐지 왕흘, 왕기라는 두 명의 인물로 등장.

왕흘의 이름으로 알려진 '기'(齮)는 사람의 이름으로 쓸 때는 '의'로 읽는데다가 《사기》의 주석서인 《사기색은》에 따르면 齮의 음주는 蟻이기 때문에 왕의로 읽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현지 연재본을 먼저 접한 한국 내 독자들은 일본 원판의 저자인 하라 야스히사가 '王騎'라고 표기했기에 스캔본 식자도 '기'로 되어버렸고, 정발판에서도 그걸 그대로 채용했기 때문에 본명이라 할 수 있는 왕흘이나 왕의보다는 왕기로 더 많이 알려지고 말았다. 원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번역자가 많은 대한민국의 현실상 일단 번역자부터 까고 보는지라 번역자가 잘못 번역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킹덤의 왕흘에 있어서는 번역자가 잘못 쓴 게 아니라 원작자인 하라 야스히사가 왕기라고 썼다. 물론 애니판에서도 어김없이 '王騎'라고 표기되어있다.[2]

물론 왕의의 경우는 원작자가 이름을 바꿔버린 특수 케이스이긴 하지만, 왕흘 이외에도 이름 표기 문제는 수없이 제기되고 있다. 번역자가 한자 독법에 똑바로 신경쓰지 않은 결과가 이런 발번역을 불러왔다.[3][4]

3.1.1. 왕흘

3.1.2. 왕기

3.2. 만화 《달인전 ~9만리를 바람에 타고~》

왕흘과 왕기로 각각 등장. 왕흘의 조카가 왕기인 것으로 그려진다.

갑옷이나 외관이 그야말로 박쥐와 같은 모습이며 실제로 박쥐들과 함께 다니는 기괴한 인물. 게다가 곤충들을 와작와작 씹어먹는 충식을 보여주면서 등장하였다. 단신으로 성벽으로 쳐들어가 적들을 학살하는 무쌍을 보여주며 상당한 무력을 보여준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젊은 시절에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했지만 현재는 진의 법에 의하여 제어되면서 자신의 힘의 반향을 알게되어 기쁘다는 말도 한다.

진의 명장 중에 하나지만 묘하게 굴욕적인 씬이 많다. 장평대전 시기에 부하의 죽음으로 이성을 잃고 날뛰려하자 은밀하게 장평에 들어온 백기가 발목에 활을 쏴서 막는다던지... 백기의 계책에 따라 미끼 역할을 하면서 분통을 삭이는 모습을 보이던지.

그래도 그 백기와 거의 투톱의 장수로 그려지며, 이름에 어울리고 새하얀 갑옷을 입고 작중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는 백기에 대비되게 밤에 활동하고 검은 박쥐로 그려지는 왕흘이 대비를 이루며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장수들을 언급할때도 항상 백기와 나란히, 혹은 그 직후에 등장하며 가히 그 실력을 짐작하게끔 한다. 여러가지 감안해야겠지만 그 염파를 1대1로 패배시키기도 하는 등 작중에서 최강의 무장 중 한명이다. 전장에서는 한 두번의 칼 휘두름으로 십수명을 학살하는 등 무력도 아주 뛰어나다.

다만 백기보다는 명백히 아래로, 자신의 군사인 범속이 죽고 미쳐 날뛰려 할때 백기가 나타나서 제압하고 설득하자 수긍하기도 했으며, 백기 스스로 자신이 아니면 왕흘을 부릴수 없다고 했고 왕흘 스스로도 백기가 자신을 부린다는 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한단 공략전에서 염파,항연을 상대로도 이기는 무쌍을 보여주지만 진나라에 환멸을 느끼고 적진으로 돌격해 사망한다.[5]

이후 작품이 진행되면서 왕기(王齮. 齮를 'き'로 읽는다) 또한 등장했다. 왕흘의 조카인 기병 장수인데, 어째 킹덤에서와 좀 많이 닮았다. 기록상 기원전 257년에 한단 공략전에서 패배하고, 247년과 244년에 등장하는데 한단 공략전에서 왕흘이 전사한걸로 처리하고, 후자를 왕기가 담당하는 듯. 대신 혼동이 오는 점과 기록에서 나오는 점을 고려해서인지 조카인 왕기가 왕흘의 이름을 내세워 활동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때문에 직접 왕흘과 싸워봤던 주인공 일행은 이것이 거짓임을 간파하나, 다른 대다수의 인물들은 아직 왕흘이 살아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혼동되는 기록을 작가 나름대로 잘 풀어쓴 셈.

신릉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이후 시간이 흘러서도 아직 그때의 상처를 지닌 채 진에서 일어난 조의 반란을 진압하며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아래 자신의 이름이 새겨질 것이라며 온몸에 상처가 터지고 불에 타는 채로 조의 병사들과 싸운다. 그때 몽오가 나타나 그를 감싸는데, 나레이션으로 이때로부터 2년후 사망하고 사기에서 왕기의 이름은 왕흘과 구분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꽤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실속은 그다지 챙기지 못하고, 자신의 무명에만 집착했다는 점에서 킹덤의 캐릭터와는 꽤 색다른 편.

3.3.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파일:조온_왕의.png
고대무장으로 등장. 병종은 효기병병계고 성우는 김영선이다. 킹덤의 영향을 받은 듯 도치문을 사용하는 오카마 컨셉이다.

[1] 《열국지》는 사서가 아니라 명나라 때 지어진 역사 소설임을 상기해야 한다.[2] 물론 킹덤에서만 그렇게 표기할 뿐, 일본내의 역사서에는 '王齮'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비상용한자인 齮는 가타카나로 대체하여 '王キ'라고 표기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환의도 이와 똑같은 이유로 환기로 표기되었다. 일본어 위키 페이지[3] 강외-강회 / 번어기-번오기 / 방난-방훤 / 표공-서공 / 호첩-호접 / 내사 등-내사 승 / 범수-범저 / 호상-호양 등등. 대부분의 동양 역사서에서는 한자의 오탈자 사례를 보정하기 위해 어떻게 읽는지를 지시하는 반절 음주가 달려 있는데, 시중에 출간된 《사기》 한국어 번역본 역시 대부분 이를 적용하고 있다. 킹덤에서 발생한 한자 오역 사례 대부분은 현대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를 비슷하게 생긴 쉬운 한자로 잘못 보고 저지른 것으로, 하다못해 동시대를 다룬 사기의 진시황 본기의 번역본이라도 제대로 정독했어도 이런 사태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4] 다만 범수/범저의 경우는 좀 달리 봐야 하는데,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이 인물은 당대의 1차 사료부터 이름자 표기가 갈리는 인물이다. 수(睢)와 저(雎)가 비슷하게 생긴 글자라서 당대 사람들도 혼동했던 흔적이 보인다. 애당초 한자문화권의 옛날 사람들은 현대인의 생각보다 한자에 정밀하지 않아서 한자로 된 문헌들을 보다 보면 당시의 중국인들조차도 자기 이름자도 틀리게 쓰는 사례도 종종 발견된다.[5] 염파,항연,방훤,이목 등 성내 모든 장수들을 상대로 무쌍을 찍고 유유히 빠져나와 본진에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