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05:43:01

왕공창 폭발 사건


1. 개요2. 전개3. 폭발 규모와 음모론

1. 개요

왕공창 폭발 사건(王恭廠爆炸事件) 또는 천계대폭발(天啟大爆炸), 왕공창의 변(王恭廠之變)이란 명나라 후기 수도 북경 남부 왕공창 일대에서 일어난 것으로 기록된 대규모 폭발로, 정확한 원인이나 규모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인화 사고에 의한 연쇄 폭발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폭발은 중국사암군으로도 평가되는 희종 천계제에 관한 민심이 이반하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2. 전개

왕공창은 명 조정의 6부 중 하나인 공부(工部) 소관으로 무구(武具) 및 화약의 제조 관리를 담당하는 조병창으로서, 북경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왕공창은 북경에 주둔하는 명의 최정예 병역인 오군영(五軍營), 삼천영(三千營), 신기영(神機營)에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첨단 화포를 개발하고 대량의 화약을 보관했으며, 명말청초에 이르면 그 규모가 매우 커져 북경 시내에 6개의 거대한 화약고를 설치할 정도였다.

폭발이 발생한 것은 1626년 5월 30일(천계 6년 음력 5월 초6일) 오전으로, 그 기록은 명의 역사책인 《희종실록》(熹宗實錄), 공식 조정 문서인 《천변저초》(天變邸抄), 만력제 시기 집필된 《명계북략》(明季北略), 명나라 사람 황욱(黃煜)이 남긴 책인 《벽혈록》(碧血錄) 등은 물론 청나라 대 집필된 《명사》(明史), 고증학자 주이준(朱彝尊, 1629-1709)의 《일하구문》(日下舊聞) 등에 모두 언급되고 있다. 이 밖의 야사에서도 여러 서적이 당시의 폭발을 언급하고 있어 폭발이 발생한 것이 역사적으로 확실시된다.

《명사》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에 따르면 폭발 원인은 화약의 자연 발화이다.
五月戊申,王恭廠災,死者甚眾。
5월 무신일, 왕공창에 재난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 많았다.
《명사》 권22 <본기제이십이 희종(本紀第二十二熹宗)>
六年五月戊申,王恭廠災,地中霹靂聲不絕,火藥自焚,煙塵障空,白晝晦冥,凡四五里。
천계 6년 5월 무신일, 왕공창에 재난이 있어 땅 속에서 벽력같은 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화약이 스스로 발화하여 연기와 분진이 하늘을 덮었고, 대낮에 어둠이 거의 4, 5리까지 드리웠다.
《명사》 권29 <지제오・오행이(志第五・五行二)>

3. 폭발 규모와 음모론

상술했듯 《명사》에서는 이 폭발로 생긴 먼지구름이 4, 5리까지 덮었다고 서술하고 있어 상당히 큰 규모의 폭발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과학적이지 못한 전근대 사료의 한계로 정확한 폭발 규모를 추정하기는 어려운데, 기록 가운데에서는 명백히 사실을 과장한 것으로 추정되거나, 아예 (교훈을 주기 위한) 우화가 섞여 있는 듯한 내용도 있기 때문이다. 해당 사건은 난세적 시대상에 비추어서 황제와 권력층을 풍자하거나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기도 했고, 따라서 당시 사료에는 명나라 말기의 참혹한 광경을 묘사하기 위한 과장이나 변작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A]

《천변저초》, 《명계북략》(明季北略) 등에서는 "진동이 수백 리까지 퍼지고 영지버섯 같은 구름이 생겼다."고도 기록하고 있으며, "폭발 뒤 하늘에서 나무와 사람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집이 수천 채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폭발의 중심에 서 있던 나무는 조금도 타지 않았다더라."라고 쓰고 있다. 이런 기술은 후대에 해당 사건이 운석 충돌, 초대형 토네이도 또는 초자연적이고 미스터리한 원인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의 소재가 되었다.

2009년 대만에서 열린 중화 과학 기술 사학회(中華科技史學會)의 심포지엄에서 왕공창 폭발 사건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는데, 이 심포지엄에서 역사학자들은 해당 사건이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해 발생했다는 이야기는 루머라고 일축했다. 사학자 양허지(楊龢之)는 "《천변저초》의 묘사를 사실대로 믿기 어렵다"고 발표했다.[2]

실제로 명나라에서 대규모 화약고 폭발이 있었던 것은 한 번이 아니며, 폭발의 규모는 갈 수록 더 크게 묘사되었다. 사학자들은 명나라의 다른 황제인 숭정제 재위 기간 17년 사이의 기록을 분석해서, 같은 왕공창을 비롯한 안민창(安民廠), 회갑창(盔甲廠) 등 화약고 폭발이 17년 사이에만 8번이나 발생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왕공창 폭발 역시 인간의 실수나 사고에 의한 단순 폭발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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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왕공창 폭발이 핵폭발이다? 명나라 시기의 민간 잡지를 읽으면 더 이상 이 사건은 미스터리가 아니다(王恭厂爆炸是核爆?少看点明朝的民间小报,它就不是未解之谜了 )" 2021년 9월 2일, 搜狐. 출처(중국어)[2] 中華科技史學會學刊, "王恭廠大爆炸座談會," 第13期 (2009年12月): 1025–1630. (Journal of the Chinese Society for the History of Science and Technology, "Discussion on the Wang Gongchang Explosion," no. 13 (December 2009): 1025–1630.)[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