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11 18:10:44

와디 할파

파일:와디 할파.jpg

1. 개요2. 역사

1. 개요

아랍어: وادي حلفا
영어: Wadi Halfa

수단 공화국 북부의 도시. 나일 강의 호수인 누비아호 (이집트에서는 나세르호)의 동안에 위치한다. 지명은 섬유로 쓰이는 에스파르토 (알파) 풀의 협곡이란 뜻이며, 인구는 약 16만명이다. 이집트-수단 국경과 20km 정도 떨어져 있고, 가장 가까운 주요 도시도 북서쪽으로 70km 떨어진 아부심벨이다. 이집트-수단 관계에 있어 중추적인 도시로, 호수를 따라 아스완과 물자 수송이 이루어진다. 이후 철도로 수도인 카르툼으로 연결된다. 역사적으로 무함마드 알리 왕조 이집트의 수단 정복, 영국의 마흐디 운동 토벌 등의 거점이었고 현대 아스완 댐 건설 당시에는 기존 시가지가 수몰되어 10km 남쪽의 현 위치로 옮겨졌으며 누비아 문화 유적 구조의 거점이었다. 또한 지리적으로 1902년 영국의 국경 설정으로 형성된 와디 할파 돌출지가 위치하게 되어 영토 분쟁의 장이기도 하다.

2. 역사

북서쪽의 나일강 서안에는 이집트 고왕국 시절부터 구리 제련이 이루어졌던 이집트의 최남단 도시인 부헨이 있었고, 이집트 중왕국 시절 석축 성벽이 둘러져 요새화되었다. 이집트 제2중간기에 쿠시인들이 점령했다가 이집트 신왕국아흐모세 1세가 다시 점령해 성벽을 강화했다. 다만 기원전 1000년 무렵 쿠시 왕국이 부헨을 정복한 후 도시는 점차 쇠퇴하여 로마 제국 시기에 버려졌다. 그러다 중세 마쿠리아 왕국 시기 와디 할파에는 성당이 건설되었고, 동시에 수단의 무슬림들도 메카 순례를 위해 경유하는 교통의 거점이 되었다. 도시 자체는 1820년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가 수단 정복을 위한 거점으로 건설했고, 알렉산드리아 ~ 하르툼을 오가는 증기선들의 중간 기착지가 되었다. 1866년에는 이집트와의 전보가 오가게 되었고, 1873-77년에는 케르마와의 철도 건설이 시도되었다.

1880년대 수단의 마흐디 운동 세력이 북상하며 와디 할파는 이집트-영국의 전방 도시가 되었고, 1889년에는 압둘 라흐만 알 마흐디가 도시를 일시 점령했으나 뒤이은 토슈카 전투에서 패한 후 철수했다. 이후 허버트 키치너가 와디 할파에 병력을 집결시킨 후 철도 건설을 추진하여 1896-97년에 와디 할파 ~ 아부 하메드 (아브리) 간 군용 기차가 다니게 되었다. 철도를 이용해 진격한 허버트 키치너의 영국-이집트 군대는 마침내 1898-99년에 마흐디국을 멸망시키고 수단을 평정할 수 있었다. 비록 이집트와는 여전히 페리로만 연결되었지만 철도는 점차 하르툼까지 연장되었고, 이로써 아부심벨 맞은편에 있던 카라반 거점 코로스코는 쇠퇴했다.[1]

1911-31년간 와디 할파에는 나일강 수위 측정소가 있었고, 1차 대전 시기 협상국의 아프리카 동부 연락망을 담당했다. 영국 지배가 끝난 1956년 기준 인구는 1만 1천명이었다. 그러던 1959년, 아스완 댐 건설이 확정되며 와디 할파를 비롯한 누비아 지역 상당부가 수몰 예정지가 되었고 1960년에 건설이 시작되자 5만 2천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1960년 10월에 와디 할파와 하르툼에서 수몰에 반대하는 누비아 인들의 시위가 벌어지자 수단 정부는 후자를 최류탄을 쏴 진압했고, 시위의 근원인 카이로 대학 하르툼 캠퍼스를 일시 폐쇄했으며 50명을 체포했다. 또한 와히 할파 일대에 계엄령을 내려 외부와의 통신을 끊었다. 결국 1964년에 댐 건설이 마무리 되어가며 기존 와디 할파 시가지는 완전히 수몰되었고, 1965년까지 시가지는 10km 남쪽인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뉴 할파라 불리게 되었다.

새 도시로 이주한 인구는 3천 2백에 불과했다. 한편 수몰과 함께 고고학자들이 일대의 이집트-누비아 유적들 중 가치 크다고 판단한 것들을 와디 할파로 옮기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 결과는 2005년에 박물관 건설 추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2014년 기준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1] 나일강이 s 모양으로 굽이치는 곳에서 코로스코는 아부 하메드까지 직선으로 가는 지름길이 시작되던 곳이다. 지금은 나세르 호에 수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