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小田 氏治1534년(천문 3년) 02월 24일 ~ 1602년(게이쵸 6년) 11월 13일[1]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 칸토 오다(小田) 가 당주. 사타케 요시아키, 요시시게 부자, 우에스기 켄신 등의 강적을 상대로 패전과 부흥을 반복하는 등, 가히 불사조와 같은 인생을 산 인물로 유명하며, 거성을 수차례 빼앗기고 45전 18승 27패라는 초라한 전적으로 전국 최약의 다이묘라는 오명도 존재한다.
한자를 보면 알겠지만 오다 노부나가 등 오와리국의 오다 가문과는 다른 가문이다.[2]
두 아들은 전사, 병사로 죽고 딸은 유키 히데야스의 첩실이 되지만 우지하루가 1602년에 사망한 뒤로는 그의 딸도 몇년 뒤에 병사하고 차남의 손자는 1638년 미노에서 병사하는 바람에 칸토 오다 가는 단절됐다.[3]
2018년 6월, 역사비화 히스토리아에서 오다 우지하루에 대해 다루었다.
2. 불사조의 혈통
오다 씨를 중흥시킨 오다 마사하루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다 씨는 우츠노미야 씨의 방계 혈족으로, 칸토에서 재지 호족으로 세력을 키웠다.마사하루의 아버지는 아시카가 마사토모로 전해지며, 그는 무로마치 막부의 호리고에 쿠보였다. 마사토모에게는 아들이 마사하루를 빼면 셋 있었는데, 첫째는 소행 불량으로 폐적되었다가 반란을 일으켜 힘으로 쿠보직을 차지하였다가 이세 소즈이에게 토벌당하게 되는 아시카가 챠챠마루, 둘째는 아시카가 요시즈미, 셋째는 챠챠마루에게 살해당한 쥰도지였다.
이중 둘째인 아시카가 요시즈미는 메이오 정변을 일으킨 호소카와 마사모토에 의하여 무로마치 막부의 11대 쇼군으로 옹립된 자였다. 즉, 우지하루는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사촌이자 아시카가 요시테루, 요시아키 형제의 당숙이 된다.
본성은 후지와라씨로써 후지와라 미치나가를 선조로 하는 것 외에도 우츠노미야씨의 일문 중 하나인 핫타 토모이에(八田知家)를 시조로 하는 관동의 명족 오다의 방계로 알려져있다. 관동 히타치의 다이묘인 오다 가문의 15대에 이르러서 오다의 마지막 당주가 되었으며. 나중에 오다 도모하루 (小田友治), 오다 모리하루 (小田守治)를 낳는다.
히타치의 사타케 요시아키와 요시시게 부자, 시모사의 유키 마사카츠와 하루토모 부자, 에치고의 우에스기 켄신과 싸우고 사가미의 호조 우지야스, 우지마사 부자와 손을 잡고 조상 대대로의 땅을 방위하는 데 힘썼다. 그후 30년 이상에 이르는 본성인 오다성 쟁탈전 등 거듭되는 합전에서 자주 승리를 거두지만 우에스기씨나 호조씨의 원조가 약해져 고립되자 사타케씨의 격렬한 공격에 노출되었다. 만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소유를 몰수당하고 다이묘인 오다 가문은 소멸했지만 후에 유키 히데야스를 섬겼다.
후세에도 전쟁에 약한 전국 무장의 대표격으로서 구전되고 있다.
3. 생애
1546년에 카와고에 성 전투에서 우에스기, 아시카가 연합 측으로 참전했지만 패배해 히타치로 도주했다.1548년 가독을 상속해 다이묘가 되었고 당시 오다 가문은 카와고에 성 전투의 패배 뿐만 아니라 인근의 사타케, 유키 등의 성장으로 가세가 기울어 가는 상황에 있었으며, 마카베 성의 성주인 마카베 히사토모가 배반했다. 1555년에 우지하루는 사타케 요시아키와 협력해 호조 우지야스와 동맹인 유키 마사카츠와 싸웠지만 1556년에 에비가시마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첫 번째로 오다 성을 빼앗겨 츠지우라 성으로 도주했다.
호조 씨가 히타치 침공을 계획하면서 히타치 북부를 다스린 사타케 씨에 대항하기 위해 화해했으며, 8월에 호조 씨의 지원을 받아 오다 성을 탈환했으며, 1557년에 사타케 요시아키가 휘하의 시모츠마 성의 성주인 타가야 마사츠네와 함께 에비가시마 성을 공격하자 우지하루는 시모츠마 성을 공격했지만 마사츠네를 지원하러 온 요시아키에게 쿠로코 전투에서 패해 츠지우라 성으로 도망치고 두 번째로 오다 성을 빼앗겼다.
1559년에 우지하루의 가신으로 츠지우라 성의 성주인 스가야 마사사다가 오다 성을 탈환했고 유키 마사카츠가 사망하고 아들인 유키 마사토모가 병으로 누워있어서 이를 호기로 여겨 유키 성을 공격했지만 마카베 우지토모에게 패배했으며, 호조 성, 에비가시마 성을 빼앗기고 1560년에는 오다 성을 세 번째로 빼앗긴다.
우에스기 겐신이 호조 씨를 공격하면서 우지하루는 우에스기 씨의 편에 서서 우에스기의 협력을 받아 오다 성을 되찾으며, 1561년 1월에는 사타케 요시아키, 코야마 히데츠나와 함께 유키 씨의 유키 성을 공격해 승리한다. 겐신이 호조 우지야스의 토벌을 위해 관동의 여러 세력을 모아 오다와라 성을 공격하자 우지하루도 참전했지만 오다와라 성을 함락하지 못한 채 철수했다.
1562년에 겐신에게 적대하는 호조 쿠보의 편에 섰고 우에스기 쿠보의 편에 선 사타케 요시아키의 지배 하에 있는 타이죠 사다쿠니를 미무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유키 씨, 나스 씨와 함께 사타케 씨에게 대항했으나, 우지하루의 배신으로 인해 1564년에 겐신이 오다령을 빠른 속도로 공격하자 막을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산오도 전투에서 패해 오다 성을 네 번째로 빼앗기고 우지하루는 후지사와 성으로 도주한다.
겐신이 돌아간 후에는 오다 성을 다시 탈환했지만 사타케 씨에게 빼앗겼는데, 1565년에 사타케 요시아키가 죽고 혼란한 틈을 타 오다 성을 탈환했으며, 여러 차례 사타케 씨와의 싸움으로 오다 성의 함락과 탈환을 반복했다.
1573년에 사타케 씨와 싸워 테바이자카 전투에서 패해 오다 성을 잃고 1574년에 츠지우라 성을 함락당했으며, 1575년에는 호조 씨가 사타케 씨와의 전투에서 이기자 츠지우라 성을 탈환하고 사타케 씨와 계속 싸웠다. 오다 성을 탈환하지 못한 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로 인해 호조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하면서 다이묘의 지위를 잃었다.
4. 말년
사타케 일족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유키 히데야스의 전봉에 따라 양아들 (적남)인 모리하루와 함께 에치젠 아사바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그 후 서장자인 도모하루도 유키 가문을 섬기고 있었을 때인 게이초 6년 (1601년) 11월 13일에 향년 68세로 사망했다. 시신은 일단 에치젠국의 에이헤이지에 묻혔지만 후에 히타치국의 신젠코지로 이장되었다.
분세이 12년 (1829년) 11월 13일에 다카오카 법운사에서 우지하루의 200주기가 거행되었다.
5. 평가
헤이안 시대부터 내려온 명문 칸토 오다 가문이 당대에 망했고 전적도 패전 수가 승전 수의 2배가 넘는 졸장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망이 두터웠고[4] 휘하들에게 사랑받는 인물로 좋은 결말을 맞이한 점이 높이 평가받는다.그 당시 전국 시대의 영주들은 백성들을 딱 안 죽을 만큼 쥐어짜는 것이 기본이었다. '향촌의 농민들이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도록 주의해서 쌀을 잘 바치도록 만들어야 한다'라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말했을 정도였다. 그나마도 그런 말을 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놀랍게도 이 전국 시대 다이묘들 기준으로 농민들에게 관대한 편으로 기본이 육공사민(세금 60%)이었고, 다이묘들 중에서는 세금을 최대 70%까지 떼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들이 자신들 나름대로 자비를 베풀어서 생산량의 절반만 거둬가겠다고 점령한 지역 농민들에게 말하자 격하게 반발하여 의병으로 일어났다는 루머가 있다.[5][6]
그렇게 농민을 함부로 하던 시대에서 지나가던 사무라이가 자신의 영지의 농민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쫓아가 당장 처벌하라고 항의할 정도로 어진 주군을 가신과 농민들 모두가 진심으로 사랑했다. 가신들은 주군이 지휘하면 지니까 우지하루를 안전하게 본진에 감금하고 자신들끼리만 출전해 성을 탈환해 오기도 했고, 우지하루가 본성을 빼앗기자 농민들은 우지하루 도노에게 바칠 수 없는 쌀 따위는 아무 쓸모가 없다며 침략자 놈이 쌀을 차지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모조리 불태워 버리는 독기를 보였는데 전국시대 일본에서 쌀이 곧 재산이었음을 감안하면 가히 충성을 넘어 광신이라 할만했다. 영주 본인의 능력은 떨어져도 그의 인품으로 밑의 사람들의 충성심을 고양시켰기 때문에 비록 여러번 패배하고 세력은 줄어들었어도 전국 시대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진정한 의미의 덕장이라 할 수 있다.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인 셈. 다만 우지하루를 전국시대에 아주 무능하고 멍청하다하는 건 가혹한 혹평이라 할 수 있다. 다이묘로써 군사와 외교를 못하는 것과 별개로 백성들과 부하들에게 인망이 크다는 것은 외정은 아주 무능하거나 못해도 내정은 아주 잘하거나 평타이상을 쳤다는 것이다. 내정까지 무능하였다면 이 정도의 부하들과 백성들이 우지하루 본인에게 과할 정도로 충성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6. 기타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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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신생 |
[1] 출생일과 사망일이 기록에 따라서 다른데, 출생년도의 경우 교로쿠 4년(1531년) 3월 12일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사망일자의 경우에는 11월 13일이 아닌 1월 6일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2] 오다 노부나가의 오다는 직전(織田)이라는 한자를 쓴다.[3] https://ja.wikipedia.org/wiki/%E5%B0%8F%E7%94%B0%E5%8F%8B%E9%87%8D[4] 적에게도, 아군에게도 존중받았으며 실제로 좌천당했을 당시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래도 가까운 친구' 정도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우에스기 겐신이 우지하루의 영지를 침략하기 전에 '그는 무력이 부족하지만, 인망이 두터운 자니 쉽게 상대할 거로 생각하면 안 될 것이다.'라는 충고를 받았고 실제로 우지하루의 성을 빼앗은 뒤엔 농민들이 쌀을 불태우고 농기구를 들고 성을 탈환하기 위해 달려들고, 가신들이 이를 지휘하며 악으로 깡으로 성을 계속 탈환하는 것에 질려 우지하루의 영지에서 물러났다.[5] 참고로 조선 중앙 정부가 가져가는 조세는 원칙적으로는 생산량의 10%였다. 물론 지방을 거쳐서 중앙에 올라가야 하므로 실제로 백성이 내는 양은 더 많았지만 그래도 당시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유독 조세가 가혹한 편이었다.[6] 조선에도 병작반수제가 있었지만 이는 조세가 아니라 지대에 해당되는 것으로 세금이 아니다. 그리고 소작농이 전부 다 소작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었고(자작+소작으로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가면 지대로 ⅓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