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예(禮)란 동아시아 윤리학과 정치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유교 문화에서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 하여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 도리 중 하나로 여겼다. 이는 유교가 약해진 오늘날에도 중요시되는 예의, 예절 개념의 기반이 된다.2. 역사
현대에는 수천년에 걸친 체계화와 철학적 고찰로 인해 예(禮)라고 하면 상대에 대한 존중을 드러내는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예라는 개념이 처음 생겨났을 때는 일방적인 명령 - 복종 관계를 나타내는 규율에 가까웠다.이는 과거에 예의란 개념이 없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그럴 만도 하다. 인간은 본래 성체에 비해 유체가 신체적으로 나약하며, 성체가 돼도 그 힘은 야생의 맹수들에 홀 몸으로 맞서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한 집안에는 어쩔 수 없이 둘 이상의 개체가 함께 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 경우 개체들 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다. 만약 아버지와 아이가 같이 밥을 먹는데, 둘 다 좋아하는 반찬이 같고 그 반찬의 양은 한정되어 있다고 치자. 지금이야 예의라는 게 철학적으로 정립되어 있어서 서로 싸움이 안 나는 거지, 수천 년 전 옛날 같았으면 '고작 반찬 하나 가지고'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고대 아시아인들은, 고대 서양인들도 그랬듯 두 개체 사이에 갈등이 발생할 때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에 일방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형태의 윤리관을 발전시켰다. 예를 들면 위와 같은 아버지와 자식의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 자식이 아버지에게 복종하게 한다. 이러면 '일단' 싸움은 벌어지지 않는다. 나이가 많은 사람과 어린 사람 사이에서는 어린 사람이 복종하게 하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는 여자가, 그리고 지도자와 백성 사이에서는 백성이 복종하게 한다. 합리적 협의와 토론 없이 한 쪽이 복종하게 한다.
이렇게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복종하고 이를 위계 질서로 만드는 식의 윤리 체계는 사회 전체적으로 확대한 정치 체계로 볼 때는 봉건제로 연결되기 쉽다. 그리고 이 봉건제를 기반으로 크게 발전한 나라가 바로 주나라이다.
2.1. 예와 악(樂)
문제는 당연히 이런 일방적 복종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는 당장은 안정적일지 몰라도 오래 가기 힘들다. 일방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한 항의를 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주나라에는 예와 함께 예를 보완하는 두 번째 통치 원리가 있었다. 이 두 번째 원리가 바로 악(樂)이다. 공자가 괜히 예악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악(樂)이란 예로 인해 경직된 사회 질서를 다소 느슨하게 만드는 조화의 원리였다. 평소에는 가족끼리 세운 규칙에 따라 잘 살다가, 갈등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되어, 집안 싸움을 대판 벌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식들 다 재워놓고 마른안주에 맥주 마시면서 서로 이해하고 화를 푸는 것이 바로 악이다. 예를 통해 사회는 유지되고, 악을 통해 사회는 조화된다. 그리고 이 둘을 합한 예악은 사회를 발전시킨다.[1]하지만 이 예악을 기본 골격으로 한 주나라도 당연히 망했다(…). 자기 마음 다스리기도 힘든데, 집안과 국가와 온 천하를 다스리는 게 언제는 쉬운 일이었나? 그래서 중국인들은 이 위태로운 사회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두 가지 시도를 하게 된다.
2.2. 보완
첫 번째는 예악이라는 개념을 분석하고 검토하는 철학적 과정이다. 공자가 선대의 예악(禮樂)이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제자들의 질문에 귀찮아하지 않고 끝없이 대답하고 토론하는 과정은, 그냥 시간 때우자고 한 게 아니라 예악이라는 개념을 보다 확고하고 정당하게 만드는 철학적 과정이었다. 공자 사상의 핵심 개념인 인(仁, 사랑)과 의(義, 올바름을 추구함)도 이 예악을 다듬고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공자에 이르러 예는 비로소 일방적 복종에서 벗어나 철학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시작한 것이다.[2]동아시아의 유가 철학이란 이 도덕에 대한 형이상학, 즉 도덕 형이상학이었고 현대까지 착실히 쌓아온 이 철학적 성과는 현대 사회에도 갈등들을 해결하는 좋은 기준이 되고 있다. 우리가 예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별 생각 없이 당연하게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과거 동아시아 사상가들의 치열한 탐구와 사색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탐구와 사색의 결과물이 바로 우리가 쉽게 말하고 실천하는 예절. 물론 예절이라는 것은 아직도 결함이 있어 현대에도 갈등은 여전히 발생하고, 우리에게는 도덕, 혹은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예악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과제들이 남아 있다.
두 번째는 예악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근본적 결함을 깨닫고 이를 혁명적으로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안회가 말했다.
"저는 얻은 바가 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물었다.
"무엇이냐?"
"저는 예악(禮樂)을 잊었습니다."
"좋다. 하지만 아직 모자라다."
며칠 있다 안회는 다시 공자와 만나 말했다.
"저는 얻은 바가 있습니다."
"무엇이냐?"
"저는 인의(仁義)를 잊었습니다."
"좋다. 하지만 아직도 모자라다."
며칠 있다 안회가 또 말했다.
"저는 얻은 바가 있습니다."
"무엇이냐?"
"저는 좌망(座忘)했습니다."
공자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좌망이 뭔가?"
"육신을 무너뜨리고 총명함을 쫓으며, 형체를 떠나 지식을 버리고, 크게 통하는 도(道)와 하나가 되는 것을 좌망이라고 합니다."
『장자』, 《대종사(大宗師)》 중(中).
위의 일화는 고대 중국의 도가(道家) 사상가들이 쓴 문헌의 일부인데, 당대 최고의 철학자[3]로 알려진 공자와 그의 제자 안회를 등장시켜 우화적으로 도가의 사상을 표현한다.[4] 위에서 보면 알 수 있듯, 도가의 학자들은 기존의 예악이라는 주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저는 얻은 바가 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물었다.
"무엇이냐?"
"저는 예악(禮樂)을 잊었습니다."
"좋다. 하지만 아직 모자라다."
며칠 있다 안회는 다시 공자와 만나 말했다.
"저는 얻은 바가 있습니다."
"무엇이냐?"
"저는 인의(仁義)를 잊었습니다."
"좋다. 하지만 아직도 모자라다."
며칠 있다 안회가 또 말했다.
"저는 얻은 바가 있습니다."
"무엇이냐?"
"저는 좌망(座忘)했습니다."
공자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좌망이 뭔가?"
"육신을 무너뜨리고 총명함을 쫓으며, 형체를 떠나 지식을 버리고, 크게 통하는 도(道)와 하나가 되는 것을 좌망이라고 합니다."
『장자』, 《대종사(大宗師)》 중(中).
이러한 도가 사상가들의 혁명적 문제 의식은 후일 도교를 비롯한 중국 민간으로 흡수되어, 그 세력이 강성해질 때마다 대규모 반란의 형태로 나타난다.
[1] 세종대왕이 박연을 시켜 조선의 음악을 정비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2] 물론 공자 이전에도 예악에 대해 다룬 사상가는 많이 있었다.[3] 당시에는 철학자라는 표현은 없었지만, 공자는 도가가 형성되던 시기에는 최고의 스승으로서 이름높았다.[4] 실제로 공자와 안회는 예악을 세우려 했지, 잊으려 한 사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