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06:37:32

여산(전한)

<colcolor=#ece5b6>
전한양왕
상국
呂産
여산
작위 <colbgcolor=#fff,#000>양왕(梁王)
최종직위 상국(相國)
여(呂)
(産)
생몰연도 ? ~ 기원전 180년
사망지 장안(長安)

1. 개요2. 생애
2.1. 전기 생애2.2. 왕의 자리에 오르다2.3. 최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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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한의 인물로, 한나라의 첫 번째 외척세력인 여(呂)씨 가문의 제후왕 겸 장군.
고황후 여씨의 오라버니 여택의 아들이며 여태의 아우로, 여택이 장수로서 공을 세웠기에 여택이 죽으면서 형과 함께 작위를 받아 교후(交侯)가 되었다.

2. 생애

2.1. 전기 생애

초한전쟁 당시에는 어떤 활약을 했는지 불분명하다. 이 당시 나이가 매우 어렸거나, 능력이 없어 딱히 활약을 못 했을 수도 있다.이후 행적을 보면 능력이 없어 활약을 못한 것이 맞는 것 같다

2.2. 왕의 자리에 오르다

초한전쟁땐 조용하다가 갑툭튀하여 양나라의 왕이 된다. 그러나 여산은 양나라로 가지 않고 장안에 남아서 황제의 태부를 맡았다. 여산의 딸이 조왕 유회의 왕후가 되었으나, 조왕은 이 왕후로 인해 자유를 잃었고 사랑하는 첩이 이 여산의 딸에게 짐살당해 자결했다. 고황후는 조왕의 후사를 끊고 대왕 유항으로 대신하려 했으나 앞선 조나라 왕들의 처참한 말로를 본대왕이 사양했다. 여산은 승상 진평과 함께 여록을 조왕으로 천거했고 고황후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다 기원전 180년에 여후가 병들어 죽을 때, 여산은 상국에 임명되어 장안의 남군을 통솔하며 북군을 통솔하는 여록과 함께 중앙군을 장악하게 된다. 여후는 유언으로 '내가 곧 죽을 텐데 그러면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니 내 장례를 미루고 군사들을 동원해 황제를 사수하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과연 여후가 죽자 주허후 유장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유장은 자신의 아내이자 여록을 딸을 정보원으로 이용해 여록의 움직임을 파악해나간다.

2.3. 최후

유장이 자기 형인 제왕 유양(劉襄)에게 관중으로 진격하라는 밀서를 보냈고, 유양이 제나라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여산은 관영에게 군사를 주어 이를 막게 한다. 그러나 토벌군을 이끌고 출정한 관영은 여씨가 반란을 일으키면 되돌아가 이를 진압하려 했고, 여씨들은 관영의 토벌군과 유양의 제나라군이 격돌하면 반란을 일으킬 심산이어서 대치가 이어지게 된다. 장안의 남북군에게 포위 꼴이었던 태위 주발과 승상 진평은 역상의 아들인 역기가 상장군 여록과 친하다는 사실을 이용해 아버지인 역상을 인질로 잡고 역기를 협박해 여록을 기만하게 했다. 결국 친구의 말이라 믿고 속아넘어가게 된 여록은 인수를 대뜸 내주고 만다. 그렇게 여록은 멍청하게 두눈 뜨고 북군을 주발에게 넘겨주게 된다. 여산은 이를 모른 상태로 미앙궁으로 향했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리게 된다.[1] 그러나 이 때까지도 여록의 북군을 손에 넣은 주발과 진평은 여산과 여산이 거느린 남군을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다.[2] 그런 와중에 여산은 군사 1천여 명을 이끌고 온 주허후 유장과 마주치게 된다. 이때 여산은 뇌정지가 오게 됐는데, 그런 여산을 유장이 대뜸 급습하였고, 마침내 화장실까지 추격해서 숨어있던 여산을 죽인다. 이후 주발, 진평, 유장 등에 의해 궁성이 완전히 정리되자 여씨 일족들은 모조리 잡혀 참수 당하게된다.

3. 평가

세트메뉴격인 여록과 함께 능력도 없이 여씨라는 이유만으로 양나라 왕에 상국까지 했던 인물이다. 여록은 북군을, 자신은 남군을 통솔하고 있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여록은 지 손으로 북군을 공신들에게 헌납하지를 않나, 본인은 멍때리다 죽지를 않나... 여산의 행적을 보면 임기응변이나 상황대처능력이 매우 딸리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황궁을 방위하는 최정예 병력인 남군을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주허후 유장을 상대로 속수무책으로 패해 죽었다는 사실만 봐도 여산의 무능력함을 알 수 있다.
[1] 혹자는 이때 여산이 미처 상황 파악을 못하고 서성거렸다거나 멍때리고(...)있었다고 한다.[2] 한나라의 군사제도에서 북군은 수도의 방위를 담당하는 부대였고, 남군은 황궁의 경비를 담당하는 부대였다. 후한 말의 제도에서도 한나라의 중앙군은 대장군이 관할했지만, 황궁의 경비는 황제의 직속 병력으로 예외였다. 때문에 태위인 주발의 명령이 정규군인 북군에게는 먹히지만, 근위대인 남군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