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 엘리자베스 바턴 Elizabeth Barton | |
| 출생 | 1506년경 | |
| 잉글랜드 왕국 켄트주 올딩턴 교구 | ||
| 사망 | 1534년 4월 21일 | |
| 잉글랜드 왕국 런던 타이번 | ||
| 직업 | 수녀, 예언자 |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가톨릭 수녀, 예언자. "켄트의 수녀", "켄트의 성녀", "켄트의 미친 처녀"라는 별명으로 불린 인물로,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을 반대하는 예언을 한 혐의로 처형되었다.2. 생애
그녀의 가족과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으며, 단지 1506년경 캔터베리에서 약 12마일 떨어진 올딩턴 교구에서 태어났다는 것만 전해진다. 아마도 그녀가 체포되어 처형된 뒤 그녀와 관련된 모든 문서가 압수되어 파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처음에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워럼의 집사인 토머스 콥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16살 때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의 환상을 봤다고 하며, 19살 때인 1525년에 복부에 혹이 생긴 증상으로 몇 달간 먹거나 마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발작과 마비 증세도 겪는 등 중병에 시달리던 중 부활절에 성모 마리아의 환상을 다시 접했다.그녀는 환상에서 깨어난 뒤 성모 마리아가 자신에게 그녀의 집에 사는 아이가 죽을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 교회에 남아있기를 간청하는 등 일련의 계시를 내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순례를 떠나라고 촉구했다. 이후 그녀의 몇몇 예언이 실제로 벌어지자, 그녀의 명성은 곧 곳곳에 퍼졌다.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워럼은 집사 토머스 콥으로부터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녀가 정말로 성모 마리아를 환상 속에서 접했는지, 그녀의 예언이 가톨릭 교리와 충돌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베네딕토회 수도원장 에드워드 보킹을 수장으로 하는 조사 위원회를 설립했다.
조사 위원회는 몇 달간 조사한 끝에 바턴이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는 걸 부정할 근거가 없으며, 그녀의 예언은 가톨릭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에드워드 보킹은 1526년 그녀를 캔터베리의 베네딕토회 성묘 수녀원으로 데려가서 8년간 그곳에서 지내게 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추종자들이 그녀가 머무는 성묘 수녀원에 순례했고, 그녀는 그들에게 환상 속에서 접한 성모 마리아의 계시를 밝혔고,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의 죄를 정확하게 말하곤 했다.
1528년, 바턴은 국왕 다음으로 잉글랜드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인물이었던 토머스 울지 추기경과 비밀 회동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이때 울지의 몰락을 예측했다고 한다. 그 직후 헨리 8세와도 두 번 회동했다. 헨리 8세는 바턴의 예언이 가톨릭의 질서를 뒷받침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후 그녀는 마르틴 루터의 교리를 강하게 비난하고, 사람들에게 경건한 삶과 왕에 대한 순종을 촉구했다. 이에 개신교 진영에서는 그녀를 "켄트의 미친 처녀"라고 비난하며, 에드워드 보킹 등이 미치광이인 그녀를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헨리 8세가 앤 불린의 밀회한 끝에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와의 결혼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바턴은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녀는 천사가 자신에게 헨리 8세가 앤 불린과의 결혼을 계속 시도한다면, 더 이상 하느님의 눈에 왕이 될 수 없어서 한달 후 더 이상 이 나라의 왕이 될 수 없으며,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계시를 내렸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헨리 8세와 카탈리나 왕비의 결혼 취소를 받아들인다면, 그에게 신의 복수가 있을 거라고 예언했다.
1533년 6월, 카탈리나 왕비가 끝내 폐위되고 앤 불린이 왕비가 되자, 바턴은 사생아로 간주된 카탈리나의 딸 메리 공주의 편을 분명히 들었고, "그녀는 누구도 그녀의 선천적 권리를 침해할 수 없을 만큼 충분한 지원과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카르투시오회와 프란치스코회가 바턴의 이 예언을 인쇄하여 배포했다. 이에 격노한 헨리 8세는 1533년 7월 그녀를 심문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11월에 전격 체포했다. 캔터베리의 새로운 대주교이며 왕의 종교 개혁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한 토머스 크랜머는 그녀를 직접 심문한 뒤 최고 법정으로 소환했다.
그 후 바턴은 런던 탑에서 심문과 위협을 받았고, 결국 압박과 고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또한 왕의 최측근인 토머스 크롬웰은 그녀에 대한 모든 기록을 수집하여 파기했으며, 바턴과 그녀를 믿었던 사람들을 성토하는 예배를 개최했다. 1533년 11월 23일, 바턴과 그녀의 추종자 일부는 런던 시내를 강제로 행진하며 대중의 조롱을 받았다. 그 후 헨리 8세는 그녀가 반란을 선동했다고 믿고, 반역죄를 적용해 처형하기로 작정했다. 기존의 반역법은 오직 반역 행위를 실제로 저질렀을 때에만 처벌할 수 있었지, 왕에게 불경한 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할 수는 없었지만, 의회는 1534년 3월에 왕의 압력을 받고 왕에 대한 불손한 언행을 하는 것만으로도 반역자로 간주할 수 있다는 특별법을 반포했다. 그 후 바턴과 그녀를 수녀원으로 데려갔던 에드워드 보킹, 윌리엄 하들리, 휴 리치, 리처드 리스비, 그리고 다른 두 명에게 반역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1534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 바턴은 28세의 나이로 타이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죽기 전에 아래의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나는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고통받을 모든 이들의 죽음의 원인입니다. 아아! 나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여자였지만, 사제들의 칭찬에 정신이 번쩍 들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칭찬에 자만심에 사로잡혀, 나는 교만과 나 자신에 대한 어리석은 환상에 굴복했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왕께 용서를 구합니다."
그녀의 머리는 몸에서 잘려 런던 브리지 위에 전시되었고, 다른 처형된 사람들의 머리도 성문 밖에서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그녀의 몸통은 리치와 리스비의 시신과 함께 뉴게이트의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에 안장되었다. 이렇게 그녀는 거짓 예언자로 단죄되었지만, 캔터베리의 성 오거스틴 성공회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바턴을 진실한 예언자로 기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