延命院事件
1. 개요
에도 막부 시대 일본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희대의 엽색 스캔들 사건. 특히 오오쿠와 고위 무가까지 관여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더욱 세간을 경악하게 한 사건이다.2. 엔메이인(延命院)
도쿄도 아라카와구에 있는 일련종의 사찰. 도쿠가와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승려 닛쵸(日長)에게 안산을 기원할 것을 명하였고, 이 기도 덕분에 이듬해 이에미츠의 측실 오라쿠노카타(お楽)가 아들 이에츠나를 낳은 이후 사찰의 건립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1648년 이에츠나의 유모 미사와노 츠보네(三沢局)가 발원하여 현재의 위치에 세워졌다. 1651년 이에츠나가 4대 쇼군이 된 이후 계속 도쿠가와 가의 비호를 받으며 세력을 유지했으나, 겐로쿠 연간 이후로는 쇠퇴했다.3. 사건 전개
도쿠가와 이에나리 치세였던 1796년 에도의 저잣거리에는 기묘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즉슨 당시 엔메이인의 주지였던 32세의 승려 니치쥰(日潤)[1]은 미남으로 소문이 자자해서 온 에도의 여인들이 그를 보기 위해 매일같이 엔메이인으로 참배를 올 정도였는데, 이 여인들 중에는 에도성의 시녀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단순히 참배에서 그치지 않고 엔메이인 내에서 남녀의 정사까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단순한 소문에 불과한 이야기였으나, 이 충격적인 내용은 순식간에 에도를 휩쓸게 되었고, 이 소문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특히 니치쥰은 여성들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일종의 철야 기도를 시작했는데, 이 철야 기도에는 외출에 제약이 심한 오오쿠와 고산케, 심지어 다이묘 저택의 시녀들이 저녁 무렵부터 찾아와 밤샘 기도를 한다는 것이었다.[2]이렇듯 엔메이인의 심상치 않은 인기와 불온한 소문에 당시 지샤부교(寺社奉行)[3]의 관리이자 하리마 타츠노번주였던 와키자카 야스타다(脇坂安董)는 이를 수상히 여겼으나, 조사할 방도가 없었다. 엔메이인의 밤샘 기도에는 오로지 여성만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성이 들어가서 내부 조사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오쿠는 에도성 내에서도 '성역'으로 여겨지는 곳이었던 만큼, 아무리 지샤부교라 해도 오오쿠 시녀들의 관여 여부를 쉽게 조사할 수는 없었다. 와키자카는 고심 끝에 자신의 가신 중 한 명의 누이동생(딸이라는 설도 있음) 나기(お梛)라는 여성을 오오쿠의 시녀로 위장, 엔메이인의 밤샘 기도에 잠입시켜 절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나기가 알아낸 사실은 실로 경악스러웠다.
엔메이인의 '밤샘 기도'란 단지 허울 좋은 명분이었을 뿐, 그 실체는 바로 니치쥰과 여인들의 적나라한 난교 파티나 다를 바 없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엔메이인에 잠입했던 나기는 몇 차례에 걸쳐 밤샘 기도에 참가하면서[4] 니치쥰이 오오쿠 시녀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금전 처리 관련 문서들, 그 외에 건물의 구조 등 수많은 증거와 비밀을 입수하여 와키자카에게 전했고, 유력한 증거를 손에 넣은 지샤부교는 1803년 5월 '밤샘 기도'가 한창인 엔메이인을 급습했다. 니치쥰과 당시 엔메이인의 재무를 맡아 보던 승려 외에도 가부키좌에서 고용해 온 남자 10여 명과 여자 20여 명도 모두 체포되었다.
당시 막부의 가신이자 문필가이기도 했던 오오타 난포(大田南畝)는 당시 와키자카가 니치쥰에게 선고한 죄목과 판결문을 정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오오쿠의 시녀와 은밀히 정을 통하여 임신시키고, 낙태까지 시켰다.
- 다이묘 저택에서 일하는 여러 시녀들과 관계를 맺었다.
- 위의 내용은 모두 승려로서 감히 해서는 안 될 행동인 바, 사형에 처한다.
승려가 저지른 성 관련 범죄는 여범(女犯)의 죄라 하여 유배형에 처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니치린의 형이 이렇게까지 무거워진 이유는 여인들과 정을 통한 것도 모자라 임신한 여성에게 낙태까지 시켰고, 지금으로 말하면 불법건축물 문제도 있었던데다 그와 관계를 가진 여성이 무려 59명에 달하는 등, 단순 성범죄의 영역을 넘었다고 판단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5]
사건의 주범격인 니치쥰은 1803년 7월 29일 참수되었다.
4. 사건의 배경
에도 시대 전체를 통틀어 유례가 없는 이 사건에 대해 일각에서는 오오쿠의 특수한 당시 내부 사정이 한 몫을 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사건 당시의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나리는 많은 첩실을 두고 자녀를 낳아 아들은 각 번에 양자로 보내고, 딸은 다이묘의 정실로 시집보내 막부와 다이묘 가문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강화하려는 의도였다고 전한다.[6]문제는 많은 측실을 두고 거기에 이들이 자녀까지 낳았으니, 오오쿠의 규모는 날이 갈수록 불어났다. 몸집이 불어난 만큼 당연히 내부 관리 감독도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오오쿠 내부의 풍기도 문란해지면서 결국 이 사건이 터졌다는 것이다.
5. 후일담
사건에 연루되었던 오오쿠와 다이묘의 시녀들은 임신, 낙태를 당했던 시녀 한 명만 유폐되었을 뿐 20여명은 모두 불문에 부쳐졌다. 그러나 사건 이후 오오쿠의 오츄로[7] 우메무라가 자살했고[8], 엔메이인에 드나들었던 시녀 중 12명이 추방되어 다시는 무가에서 일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고산케 중 오와리 도쿠가와의 시녀 3명은 무기한 자택 근신 처분을 받았다가 후에 모두 자살했다.또한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이 사건의 실체를 알리는 데 공을 세웠던 나기도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씁쓸한 뒷이야기가 있다.
6. 기타
엔메이인 사건에 묻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오오쿠와 사찰이 엮인 스캔들로 치센인 사건(智泉院事件)이 있다. 이에나리의 측실 중 한 명과 그 부친이 연관된 사건으로, 치센인의 주지였던 승려 닛케이라는 자가 평범한 절에 불과했던 치센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딸을 이에나리의 측실로 들였고, 후에 딸이 이에나리의 총애를 받게 되자 치센인 측이 이를 이용해 온갖 비리와 횡포를 저지르고[9] 젊은 승려들과 여성들이 난잡하게 관계를 맺은 사건이다.[10]물론 치센인 사건 역시 좋지 못한 결말을 맞았다. 이에나리 사후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쇼군으로 즉위, 그의 가신 중 한 명인 후쿠야마번주 아베 마사히로가 지샤부교에 취임한 뒤 치센인의 온갖 부정과 사찰 내에서 벌어진 음행을 적발해 냈고, 이에 따라 닛케이와 당시 주지[11]를 포함한 승려들은 모두 유배형에 처해졌지만 에도를 벗어나기 전에 모두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1] 혹은 니치도(日道)라고도 한다.[2] 여기에는 니치쥰의 외모 뿐만 아니라 잠자리 스킬(...)도 보통이 아니라는 소문이 여인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돌았던 것도 있다.[3] 무로마치 시대에서 에도 시대에 걸쳐 절 또는 신사의 영지와 인사, 관련 소송 등의 업무를 담당했던 기구.[4] 물론 이 때 나기도 니치쥰의 눈에 들어 여러 차례 그와 관계를 가졌다.[5] 게다가 위에도 언급되었듯 오오쿠와 고위 무가의 여성들이 연루되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된 것으로 보인다.[6] 해당 문서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이에나리는 생애를 통틀어 40명 이상의 측실을 두고 총 55명의 자녀를 둔 역대급 다자녀 쇼군으로 유명했다. 오죽했으면 이 때문에 물개 쇼군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7] 御中﨟. 오오쿠의 직분 중 하나로 쇼군 또는 쇼군의 정실의 시중을 드는 시녀. 대략 조선 시대로 치면 지밀상궁 정도에 해당되는 직분이다.[8] 자살 이유는 유폐당한 시녀가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시녀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9] 원래는 일련종의 대본산인 호케쿄지의 말사에 불과한 절이었다가 주지의 딸이 쇼군의 총애를 받는 측실이라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격이 올라가면서 횡포를 부린 탓에 치센인에 대한 에도성 내부의 평판은 밑바닥이었다.[10] 현대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성상납을 한 격으로, 당시의 기록을 보면 거의 현대의 호스트바 수준으로 묘사되어 있다. "궁녀의 음문을 질릴 때까지 중에게 대접하였고..."라는 낯뜨거운 기술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을 정도.[11] 이 시점에서 닛케이는 이미 70세의 고령으로, 후계자에게 주지 자리를 물려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