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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드 몽탈랑베르

파일:Buste_d'André_de_Montalembert,_seigneur_d'Essé.jpg
성명 앙드레 드 몽탈랑베르
André de Montalembert
출생 1483년
프랑스 왕국
사망 1553년 6월 12일 (향년 69 ~ 70세)
프랑스 왕국 테루안
아버지 샤를 2세 드 몽탈랑베르
어머니 샤를로테 에우
형제 자크
배우자 카트린 디예 드 라드르
자녀 가브리엘 1세 드 몽탈랑베르
직위 에세, 몽탈랑베르, 에팡빌리에, 드 라 리비에르의 영주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군인. 이탈리아 전쟁거친 구혼에서 활약했다. "용감한 에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 생애

에세, 몽탈랑베르, 에팡빌리에, 드 라 리비에르의 영주 샤를 2세 드 몽탈랑베르와 샤를로테 에우의 차남이다. 형 자크가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한 후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일찍이 푸아투의 집사 앙드레 드 비본의 시동으로 일했고, 1495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한 뒤 7월 6일 포르노보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다. 이후 그를 눈여겨 본 집사 앙드레 드 비본은 그를 훗날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될 앙굴렘 백작의 궁정으로 안내했다. 그는 앙굴렘 백작의 신하가 되었고, 그와 함께 모든 군사 및 스포츠 행사, 즉 토너먼트와 링 승마 경기에 참여했다.

1520년 일명 "금천의 들판"으로 일컬어지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의 대규모 평화 협상 장소에서 열린 토너먼트에 참여해 탁월한 승마술과 투창 기술을 선보여 수많은 이의 주목을 받았다. 1535년 1,000명의 슈발레거 부대를 이끌고 브리옹 제독 프랑수아 샤보의 피에몬테 원정에 참여해 그곳을 공략하는 데 공헌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토리노를 위협하자, 그는 토리노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해 1537년 평화 협약이 체결될 때까지 토리노를 지켰으며, 1536년 키리아 요새를 공략했다.

1543년 카를 5세의 5만대군에 포위 당한 랑드르 시 수비대를 이끌고 구원군이 올 때까지 끝까지 사수했다. 이후 프랑수아 1세에 의해 왕의 처소를 관리하는 귀족으로 선임되어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545년 9월 잉글랜드군이 점령한 불로뉴 인근에 건설된 우트로 요새 사령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전염병으로 수비대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2년 넘게 요새를 성공적으로 지켰다.

1548년 4월 28일, 잉글랜드의 침략으로부터 스코틀랜드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프랑스 원정군의 중장 겸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5월 22일 브레스트를 출발해 6월 18일 던바에 상륙했다. 그의 첫 임무는 당시 6살이었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를 프랑스로 데려와 도팽 프랑수아 2세의 아내로 삼는 것이었다. 그 후 헤딩턴 공략전을 진두지휘했지만, 5천 명 밖에 없어서 훨씬 많은 숫자로 몰아붙이는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수비에 전념해야 했다. 그는 적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격파해 적병 500명을 사살하고 기병 장군을 포함한 여러 병사를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고, 자기가 주둔한 리스 요새를 강화하는 데 힘썼다. 이후 프랑스 보병 4개 중대의 지원을 받고 인근의 여러 요새를 공략했고, 1549년 6월 19일 또는 29일 스코틀랜드 포스만 한 가운데에 있는 인치키스 섬을 공략했다.

이후 폴 드 라 바르트 드 테르메와 교체되어 프랑스로 귀환한 앙드레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로부터 성 미카엘 기사단에 선임되었고, 앙블레퇴즈의 사령관으로 선임되어 잉글랜드군에게 장악된 그곳을 탈환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1550년 불로뉴 평화 조약이 체결된 후, 그는 전투 도중에 입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1552년 프랑스군에 합류한 뒤 로렌을 침공하고 메츠, 툴, 베르됭을 정복했다.

1553년 테루안 수비대를 이끌고 카를 5세가 이끄는 6만 대군에 맞서 항전했다. 1553년 6월 12일, 황제군 포병대가 5만 발에 달하는 포격을 가하면서 60보 구간에 걸쳐 요새 성벽이 무너지자, 그는 무너진 성벽에 군대를 배치한 뒤 친히 이들을 이끌고 10시간 동안 사력을 다해 항전한 끝에 끝내 격퇴했지만, 도중에 스페인 장교가 쏜 총에 맞고 창을 든 채 숨을 거두었다. 그 후 프랑수아 드 몽모랑시가 지휘권을 잡았지만, 6월 20일에 끝내 항복했다.

3. 가족

  • 카트린 디예 드 라드르: 라 드르의 영주 장 디예와 나바라 여왕 카탈리나 1세의 시녀였던 마들렌 드 주와외즈의 딸.
    • 가브리엘 1세 드 몽탈랑베르(? ~ 1568): 에세, 몽탈랑베르, 에팡빌리에, 드 라 리비에르의 영주. 프랑수아즈 데사르 드 소투르와 결혼해 외아들 가브리엘 2세 드 몽탈랑베르를 낳았다. 가브리엘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지를 물려받았지만, 1587년 위그노 전쟁 기간에 벌어진 쿠트라 전투에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전사했고, 에세 영주 가문의 영지는 트리옹 가문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