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22:31:19

암비오릭스의 난

갈리아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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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경과
3.1. 14군단의 전멸3.2.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위기3.3.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구원3.4. 로마군의 반격과 반란 평정
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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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54~53년, 암비오릭스의 에브로네스족을 중심으로 뭉친 켈트인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로마군을 상대로 대대적으로 일으킨 반란.

2. 배경

기원전 5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은 갈리아 동북부에서 강력한 세력을 갖춘 벨가이인들을 상대로 악소나 전투사비스 전투, 아투아투키 공방전에서 제압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호승심이 강한 벨가이 인들이 또다시 봉기하는 걸 막기 위해 강한 부족의 복속을 받던 약소 부족들을 해방시키고, 인질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러한 조치로 혜택을 받은 부족들 중 하나가 바로 벨가이인들 중에서도 최북단에 거주하는 에브로네스족이었다. 그들은 아투아투키족에게 복속되었다가 로마군에게 해방되어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대체로 로마에 긍정적인 편이었고, 로마군은 이들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벨가이 인들 사이에서 로마군에 대한 반감이 강해졌다. 군단병들은 그들의 영역에 주둔하면서 주민들로부터 대량의 식량을 공출했다. 기원전 54년 가뭄으로 수확량이 미진했으나 예년과 같은 양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이로 인해 부족민들이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내자, 카이사르는 기원전 54년 11월 퀸투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아우룬쿨레이우스 코타에게 14군단 게미나와 다른 군단에서 차출한 5개 코호트를 이끌고 카르누테스 족의 영역에서 겨울 숙영하면서 이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게 했다.

트레베리 족장 인두티오마루스는 로마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키려 했지만, 로마군이 벨가이 인 중 세력이 강한 편인 트레베리 족을 경계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암비오릭스에게 봉기를 일으키라고 제안했다. 그가 어떤 말로 설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암비오릭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공동 부족장인 카티볼코스를 설득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리하여 갈리아 전쟁 사상 로마군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암비오릭스의 난이 발발했다.

3. 경과

3.1. 14군단의 전멸

기원전 54년 겨울 식량 채집을 수행중이던 로마 병사들을 공격했다. 로마군이 숙영지로 퇴각하자, 암비오릭스는 부족민들을 동원해 숙영지를 공격했지만 격파되었다. 이에 암비오릭스는 사절을 보내 화해를 청하면서, 로마군을 공격한 건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부족민들이 벌인 일이고, 갈리아 전체가 이미 들고 일어날 예정이며 게르만족 대부대가 라인강을 건너 이틀 뒤 숙영지를 대대로 공격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은 로마를 지지하므로 이를 귀뜸해주는 것이니, 게르만족이 이르기 전에 이 지역에서 철수하라고 권했다. 그러면서 로마군이 자신이 다스리는 영역을 통과할 때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코타는 요새화된 진영을 방어하고 카이사르가 구원하기를 기다리자고 주장했지만, 사비누스는 암비오릭스의 조언을 따르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결국 더 높은 직위에 있던 그의 의견이 관철되었고, 로마군은 숙영지를 떠나 숲길로 행군하다가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갈리아군의 습격을 받았다. 코타는 부대에게 짐을 버리고 원진을 짜라고 지시하여 항전했던 반면, 그는 어찌할 바 몰라 허둥지둥거리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포위망을 풀 가망이 없고 병사들이 점점 죽어나가자, 그는 암비오릭스에게 통역을 보내 자신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암비오릭스가 회담하러 오라고 하자, 그는 이에 따르려 했다. 코타는 얼굴에 돌을 맞아 중상을 입은 몸이었지만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느니 끝까지 싸우다 죽자"고 강하게 권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를 뿌리치고 회담하러 갔다가 기습공격을 받아 부관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코타는 그대로 남아 로마군을 지휘하다가 갈리아군의 맹공격으로 전사했다. 이리하여 제14군단과 5개 대대는 전멸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에서 이 패배의 원인이 오로지 암비오릭스의 책략에 속은 사비누스의 아둔함에 있다고 몰아세웠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애초에 로마에 적대적인 부족민들의 영역에 군대를 분산시켜 배치한 카이사르의 결정에 문제가 있었으며, 카이사르가 자신의 실책을 감추기 위해 사비누스를 무능한 장군으로 매도했다고 본다. 실제로 독자적으로 노르망디 일대의 갈리아족을 평정했고,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 원정을 떠났을 때 반란을 일으킨 메나피족을 제압하기도 할 정도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편이었던 그가 갈리아 전기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무능하고 겁많은 인물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3.2.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위기

로마군을 섬멸한 뒤, 암비오릭스는 전사한 로마 병사들의 무기와 갑옷을 벗겨 부족민들의 무장을 강화시켰다. 그 뒤 아두아투키 족의 영역으로 진군해 그들의 호응을 얻어냈고, 네르비족도 봉기에 동참했다. 이후 로마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각지에 파다하게 퍼지면서, 수많은 부족민들이 암비오릭스에게 동참했다. 암비오릭스의 병력은 2배 이상 늘어났고, 네르비족의 영역에 주둔한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진영으로 기세등등하게 진격했다.

이런 상황은 까맣게 모른 채 식량을 채집하고 있던 로마군은 갈리아인들의 갑작스런 공세에 당황했다. 요새 밖에 있던 자들은 상당수 전사했지만, 나머지는 급히 요새 안으로 들어간 뒤 농성에 들어갔다. 갈리아인들은 숙영지를 포위한 뒤 맹공을 퍼부었지만, 로마군이 결사적으로 맞서 싸우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하고 많은 전사자를 양산했다. 이에 암비오릭스는 다시 한 번 기만전을 시도하기로 마음먹고, 키케로에게 담판을 청했다. 그는 사비누스와 코타가 전사하고 14군단이 궤멸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며, 자신은 그들을 공격하고 싶지 않지만 다른 부족들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게르만인들이 곧 대대적으로 몰려올 거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안전을 보장할 테니 어서 떠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키케로는 무기를 든 적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로마의 정책이 아니며, 자신은 카이사르로부터 지시를 받기 전에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답하며 거절했다. 그러면서 암비오릭스가 군대를 해산시킨다면, 자신은 카이사르에게 상황을 알리고 그의 결정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속임수가 통하지 않자, 암비오릭스는 전군에 공격을 계속 퍼부으라고 명령했다. 키케로와 로마 병사들은 혈투를 벌였지만, 수적으로 워낙 열세해 악전고투를 해야 했고, 대부분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키케로는 전령들을 카이사르에게 몇 차례 보냈지만 모두 붙잡혀 요새 수비대가 지켜보는 앞에서 고문당하다 죽었다.

그러던 중 베리코라는 이름의 네르비인 노예가 키케로에게 접근했다. 그는 충성스러운 갈리아인 노예 몇 사람과 함께 카이사르에게 가서 이 상황을 알릴 테니 보내달라고 청했다. 키케로는 일이 성공한다면 그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고, 창으로 된 축대에 메시지를 담아가 그에게 전달했다. 베리코는 곧바로 진영을 떠나 갈리아인들의 진영을 지난 뒤 진영을 빠져나오자 곧바로 달려갔고, 며칠 후 카이사르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3.3.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구원

카이사르는 베리코가 가지고 온 키케로의 메시지를 보고나서야 14군단이 전멸하고 키케로의 진영은 포위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근처에 있는 병사 7,000명을 즉각 이끌고 출진하면서 다른 곳에 주둔한 군단에게도 즉시 구원을 보내라고 촉구했다. 그는 네르비 족의 영역을 침공하여 몇 사람을 포로로 잡아 심문하면서 암비오릭스의 봉기와 키케로의 군단이 포위된 사항을 알게 되었다. 이후 믿을 수 있는 켈트인에게 다른 창 안에 숨겨진 메시지를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켈트인은 포위된 키케로의 진영 근처에 이르렀으나 진영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여 창을 성벽 위로 힘껏 던져서 전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벽에 꽂힌 창은 사흘 동안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지만 다행히 한 병사가 이 창의 정체를 눈치채고 창 안의 메시지를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해당 메시지는 그리스어로 쓰여있었으므로 진영 내에서 이걸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키케로에게 전달되었고, 키케로는 메시지를 읽고 모두에게 카이사르가 근처에 왔으니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싸우라는 지시를 알렸다. 하지만 적에게 경각심을 주지 않도록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바꾸지는 말라고 지시했다.

암비오릭스는 이 사건 이후에도 로마군 진영을 수시로 공격했지만 좀처럼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중 수 마일 떨어진 언덕에서 불길이 치솟자 그제야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근처에 왔다는 걸 깨달아 포위를 풀고 카이사르를 향해 진격했다. 카이사르는 적이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함정을 파기로 했다. 그는 언덕 고지에 숙영지를 세우되, 일부러 적정한 규모보다 작게 짓고 부하들에게 다가오는 군대에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성벽 너머로는 짧은 진격만 해서 싸울 의지가 없는 것처럼 연출하도록 했다.

갈리아인들은 이 모습을 보고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로마군이 훨씬 적고 전의가 없다고 여겼다. 카이사르는 결정적인 기회가 올 때까지 계속 속임수를 곁들여 일부러 기병 몇 개 부대를 패하고 돌아오도록 지시하여 완전히 방심한 갈리아인들이 요새로 쳐들어오게 했고, 갈리아인들이 쳐들어오는데도 진영 문을 개방하고 성벽 위에 아무도 배치하지 않았다. 갈리아인들이 이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하며, "어서 항복하지 않으면 몰살하겠다."라고 외치기까지 할 때, 카이사르가 돌격 명령을 내렸고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로마군이 기병대를 앞세워 뛰쳐나와 적을 향해 맹렬히 공격했다. 갈리아인들은 이 공격에 당황하여 순식간에 붕괴되었고, 수많은 병사가 언덕을 급히 내려가다가 동족에게 깔려 압사했다. 암비오릭스와 측근 몇 명은 기병대의 추격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가까스로 피했다.

적군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키케로의 진영에 입성한 뒤 키케로와 병사들을 칭찬했다. 당시 키케로의 진영을 지키던 병사 중 부상을 입지 않은 자는 10분의 1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때 카이사르는 정신없이 달려와서 전투를 치르느라 병사들과 재회할 때까지 면도를 못해 수염이 얼굴을 덮었고 씻지 못해 머리도 얼굴도 옷도 매우 꼬질꼬질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도 항상 면도하고 깔끔떨며 멋부리기를 좋아했던 카이사르였던 터라, 키케로의 군단은 이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고 충성을 다짐했다고 한다.

3.4. 로마군의 반격과 반란 평정

카이사르가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갈리아인들은 사절을 주고받고 정보를 교환했으며, 부족장끼리 모여 회의를 거듭해 반란을 도모했다. 카이사르는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받고 겨울에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에 돌아가던 관행을 깨고 갈리아에 그대로 남기로 했다. 암비오릭스는 에브로네스 족의 영역에서 방어 태세를 갖췄고, 트레베리족의 인투티오마루스는 라인강 너머의 게르만족을 설득해 자기 편으로 삼으려 애썼지만 별 호응을 얻지 못하자 트레베리 족의 영역으로 돌아가 대규모 병력을 모은 뒤 티투스 라비에누스의 숙영지로 쳐들어갔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가 했던 것처럼 병력이 겁먹은 것으로 위장하면서 인투티오마루스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인투티오마루스는 자신감을 갖고 숙영지 근처를 계속 돌았다. 그가 방심한 걸 눈치챈 라비에누스는 기병을 기습적으로 출격시켜 인투티오마루스를 살해했다. 트레베리족은 부족장을 잃자 도주했고, 기원전 54/53년 겨울에 벌어진 유혈 충돌은 이것으로 종결되었다.

기원전 53년 봄, 카이사르는 로마의 국력이 강력하다는 걸 켈트인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3개 군단을 추가 동원하기로 했다. 3개 군단 중 하나는 폼페이우스에게 빌렸는데, 이는 폼페이우스와 그의 우정을 원로원에게 과시하려는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이었다. 폼페이우스에게서 빌린 군단은 제1군단이었는데, 나중에 6군단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새로 신설된 군단은 각각 14군단, 15군단으로 지어졌다. 카이사르는 4개 군단을 동원해 네르비족의 영토로 진격해 단숨에 격파하고 철저히 약탈해 전리품을 분배했다. 이후 군단 기지로 돌아가 갈리아 회의를 소집했는데, 트레베리족, 에브로네스족, 세노네스족, 카르누테스족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이들을 토벌하기로 했다.

우선 세노네스족을 향해 진격해 부족장 아코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양분하여 2개 군단을 라비에누스의 군단에게 주고 자신은 5개 군단과 함께 에브로네스족과 동맹을 맺고 있던 메나피족을 향해 진격했다. 메나피족은 숲속으로 이주하려 했지만 카이사르에게 따라잡히자 항복했다. 한편 트레베리족은 대군을 모은 뒤 라비에누스를 공격하려 했지만, 카이사르의 2개 군단이 근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하려 했다. 하지만 라비에누스가 계속 겁먹은 것처럼 위장하자 이들은 마음을 바꿔 카이사르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라비에누스의 1개 군단을 공격했으나 격파당했다.

메나피족 문제를 해결한 카이사르는 트레베리 족의 영토에 진입하여 라비에누스의 군단을 휘하에 거둔 뒤 트레베리족의 부족장으로 친로마파 인사를 임명했다. 이후 갈리아족과 연락하던 게르만족을 위협하기 위해 다리를 놓아 라인강을 도하했으나, 게르만족이 숲속에 숨은 채 나오지 않자 도로 돌아갔다. 이후 에브로네스족을 향해 쳐들어가자, 암비오릭스는 부족민들을 이끌고 숲속을 전전하며 피해다녔다. 그들은 재산을 숲속 여러 곳에 분산시켰는데, 카이사르는 이를 약탈하기 위해 로마군이 뿔뿔이 흩어지면 기습당할 걸 우려했다. 이에 주변 갈리아 부족들에게 사절을 보내 숲에 흩어져 있는 에브로네스족의 재산을 마음껏 약탈해서 소유하라고 부추겼다.

주변의 많은 부족들이 카이사르의 유혹에 넘어가 각기 군대를 이끌고 에브로네스족의 영토로 진입했다. 심지어 라인 강 너머의 게르만 계열 수감브리족도 이에 눈독을 들여 기병 2천 기를 모아 에브로네스족의 영토로 들어가 에브로네스족을 공격하고 약탈했다. 그들은 얼마 후 카이사르군이 보급품을 한 군데에 모아놓았다는 소문을 듣고 곧장 그곳을 공격했다가 격퇴되었다. 암비오릭스를 한창 쫓던 카이사르는 이 소식을 듣자 철수했고, 암비오릭스는 목숨을 간신히 건진 채 라인 강을 건너 숲속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에브로네스족은 거의 죽거나 사로잡혔고,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4. 이후

카이사르는 암비오릭스의 난을 평정한 뒤 부족회의에 불참했다가 로마군을 맞닥뜨리자 항복한 세노네스 족장 아코를 처형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모든 부족장이 보는 앞에서 아코를 채찍질한 뒤 목을 베도록 했다. 이는 로마에 협력하는 게 선택이 아닌 의무이며, 다시는 반항할 생각하지 말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그 후 자신의 부대를 갈리아 각지에 배치한 뒤 북이탈리아로 떠났다.

카이사르는 이제 갈리아가 평정되었으리라 여겼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갈리아인들은 로마인들의 오만한 태도에 분노했고, 로마군을 어떻게든 몰아내어 자유를 되찾으려 했다. 이때 아르베르니 족에서 베르킨게토릭스가 등장했고, 카이사르는 기원전 52년 암비오릭스의 난보다 더 큰 봉기에 직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