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파나마와 칠레 총독 알론소 데 소토마요르 이 발베디아노 Alonso de Sotomayor y Valmedian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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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 | 알론소 데 소토마요르 이 발베디아노 Alonso de Sotomayor y Valmediano |
| 출생 | 1545년경 |
| 스페인 제국 엑스트레마두라 트루히요 | |
| 사망 | 1610년경 |
| 스페인 제국 | |
| 아버지 | 구티에레 데 소토마요르 이 히노호사 |
| 어머니 | 베아트리스 데 발메디아노 |
| 직위 |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 파나마 총독, 칠레 총독. |
1. 개요
누에바에스파냐의 파나마와 칠레 총독. 젊은 시기 누에바에스파냐의 총독으로서 잉글랜드군과 맞서고 식민지 관리를 책임졌다.2. 생애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친척인 구티에레 데 소토마요르 이 히노호사와 베아트리스 데 발메디아노의 아들이다. 15살 때 처음으로 군대에 입대했고, 15657년까지 이탈리아에서 복무한 후 플란데런으로 이동했다. 1580년 특수 임무를 맡아 마드리드로 돌아왔고, 펠리페 2세로부터 유능함을 주목받아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 작위를 받고 안토니우를 몰아내고 펠리페 2세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원정에 동원되었다.이 무렵, 칠레에서 총독 마르틴 루이스 데 감보아의 폭정에 반발한 원주민들의 대규모 봉기인 아라우코 전쟁이 갈수록 악화하여 증원군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소토마요르에게 대규모 병력을 맡기고 새 칠레 총독으로 임명하기로 했다. 1583년 9월 19일 칠레에 도착한 그는 산티아고 시청 건물에서 감보아를 체포했다가 나중에 보석으로 풀어줬다. 그 후 그의 총독으로서 내린 첫 번째 결정은 감보아가 원주민에게 매긴 무자비한 세금을 폐지하고, 세금의 형태를 원주민들이 견딜만한 수준으로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금을 조정하여 민심을 어느 정도 수습한 뒤, 소토마요르는 아라우코 전쟁을 주도하는 부족인 마푸체족을 상대로 여러 차례 원정을 벌였다. 수년간 마푸체를 이끌던 메스티소 알론소 디아스를 생포했으며, 동생 루이스에게 별동대를 맡겨 발디비아 인근 지역으로 보냈다. 1585년 1월 16일, 루이스는 앙골에서 마푸체족의 기습 공격을 격퇴했다. 소토마요르는 이어서 마푸체족과 북부 원주민 부족 간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비오비오강 양쪽 기슭의 밀라포아에 요새를 건설하라고 명령했고, 푸렌에도 또 다른 요새를 짓고 소규모 병력을 주둔했다. 소토마요르는 이 지역들에 곧 도시를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이것이 부족들을 진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고, 앞으로 받게 될 증원군이 칠레를 완전히 정복하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조치들은 마푸체족을 약화하지 못했다. 알론소 디아스를 생포했지만, 마푸체족은 새 지도자를 세우고 계속 저항했으며, 요새화도 원하는 효과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원주민들은 스페인 무기와 말을 다루는 데 점점 더 능숙해졌다. 다만 아르케부스만큼은 여전히 사용할 줄 몰랐는데, 어차피 화약이 부족해서 사용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토머스 캐번디시를 비롯한 잉글랜드 사략선 해적들의 공격도 있었다. 캐번디시는 1587년 4월 9일 퀸테로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또한 소토마요르는 칠레 남부에서 병사들이 토지 하사금 대신 임금을 받기를 원하며 일으킨 두 차례의 반란에도 대처해야 했다.
이러한 난관에 직면한 소토마요르는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1592년 7월 30일에 페루로 향했고, 그곳에서 2년 전 칠레의 부총독 겸 대법원장을 맡았던 페드로 데 비스카라를 지휘관으로 고용해 병력을 모집하여 칠레로 오게 했다. 그러나 그해 8월, 칼라오에서 펠리페 2세가 칠레의 새 총독으로 마르틴 가르시아 오녜스 데 로욜라를 선임했으며, 자신이 반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칠레로 돌아간 뒤 재판에 출석해 승소한 후 스페인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리마에서 페루 총독으로부터 파나마 지방의 통치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파나마는 영국-스페인 전쟁 중 엘리자베스 1세가 중앙아메리카 지역에 영구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파견한 잉글랜드 함대의 위협을 받았다.
소토마요르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파나마 총독으로 부임한 뒤 수비대를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1596년 1월 6일~1월 20일,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파나마로 쳐들어왔다.(드레이크의 파나마 원정) 이에 소토마요르에 의해 조직된 수비대가 지형의 이점을 살려 효과적으로 맞섰고, 드레이크는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역병에 시달리자 파나마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하다가 1596년 1월 28일에서 29일 밤에 기함 디파이언스 호에서 이질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드레이크를 격퇴한 후 스페인으로 돌아온 소토마요르는 1604년에 다시 칠레 총독으로 임명되었지만, 그곳에서의 쓸쓸한 기억 때문에 거절했다. 이후 인디아 평의회에 합류했고, 1609년에는 그라나다에서 모리스코 추방을 지휘했다. 1610년경 사망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