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16:34:07

아이슬란드 자유국

아이슬란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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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자유국
Íslands þjóðveldi | Þjóðveldið Ísland
파일:아이슬란드 위치.svg
930년 ~ 1262년
(332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아이슬란드 부족 연합체 노레그 왕국
위치 아이슬란드 섬
역사 건국 930년
멸망 1262년
수도 팅크베틀리르
정치 체제 의회민주주의
정치 제도 알팅그(Alþingi)
종교 고대 노르드 종교(서기 1000년 이전 국교)
기독교(서기 1000년 이후 국교)
무신론(goðlauss)[1]
민족 노르드인
언어 고대 노르드어
현재 국가
[[아이슬란드|]][[틀:국기|]][[틀:국기|]]

1. 개요2. 역사3. 정치
3.1. 사법 제도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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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30년 의회인 알팅그(Alþingi)가 설립된 이후부터 1262년 성경으로 노르웨이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전 까지 존재했었던 세계 최초의 의회민주주의 공화국.

아이슬란드 자유국은 고디(goði)라는 여러명의 족장들이 함께 법을 만들고 알팅그에서 법적 분쟁을 해결하는 정치제도를 가졌다. 그러나 아이슬란드 자유국은 행정부가 없었기 때문에 법을 강제할 수단이 없었고, 판결을 집행에 옮기는 것은 승소한 측의 사적제재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아이슬란드 자유국은 무정부주의 중 하나인 아나르코자본주의적 사회라 여겨지기도 한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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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자유국은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수준의 민주정을 갖추었고, 그덕에 농민 봉기가 거의 없었다.[2] 그 까닭은 당시 노르웨이의 왕 하랄 1세 하르파그리[3]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아이슬란드 개척을 주도했었고, 아이슬란드 자유국은 그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3. 정치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아이슬란드 알팅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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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자유국은 여러 고디(goði)라 불리는 족장들에 의해 다스려졌는데, 이 고디들이 영향이 미치는 범위를 고도르드(goðorð)라고 했다. 그런데 이 고도르드는 지역별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이라면 어느 고디를 지지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다. 특정 고디를 따르는 자유민 지지자들을 팅그마드르(Þingmaðr)라고 했는데, 팅그마드르는 고디가 자신의 이권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자신이 지지하는 고디의 군사가 되어야 했었고, 유권자로서 지역별 팅그와 섬 전체의 알팅그(Alþing)에 참여해야 했다.

지역의회라 할 수 있는 팅그(Þing)는 13개 존재하였고, 매년 봄 분쟁 조정을 위해 정기적으로 소집되었다. 그리고 섬 전체 의회인 알팅그에서는 고디들이 자기 유권자들을 대표하는 지도자 역할을 했다.

알팅그는 매년 6월에 섬 전체의 자유민이 모두 모여 2주간 개최되었다. 알팅그에는 로그레타(Lǫgrétta)라고 해서 일종의 법제위원회가 있었다. 로그레타는 알팅그의 핵심 기관으로서 법을 평가하고 수정하는 일을 했다. 로그레타는 39명의 고디들과 자문가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3년에 한 번 의장격인 로그마드(lǫgmaðr, 법 말하는 이)를 선임하였다. 로그마드는 법전의 내용 전체를 외워서 팅크베틀리르 중앙의 뢰그페르크(법바위)에서 암송하였다. 그리고 의전 지도자격으로 알스헤랴르고디(모든 사람들의 고디)가 있어서 알팅그를 축성(祝聖) 하였는데, 이 직위는 관례적으로 잉골프 아르나르손의 후손들이 세습하였다.

고디는 누군가에게 양도되거나, 거래될 수 있었고 세습될 수도 있었으나, 여성이 고디를 세습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고디는 사유재산처럼 다뤄졌지만, 과세 대상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3.1. 사법 제도

고도르드 체제에서 아이슬란드섬은 4개의 표르둥그(fjórðungr)로 나뉘었다. 한 표르둥그에 아홉 명의 고디가 있었고, 알팅그에는 사법부에 해당하는 표르둥스도무르(fjórðungsdómur)가 있었다. 표르둥스도무르는 판관(判官)들로 구성되었으며, 이 판관들은 36명의 모든 고디들이 각자 선임하였다. 사법부에서의 판결은 압도적 다수결로만 확정될 수 있었다. 판관들 가운데 6명만 판결에 동의하지 않으면 사건은 그대로 기각되었다.[4] 그러나 특이하게도 아이슬란드 자유국은 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이 나와도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공권력이 없었다. 그래서 판결의 집행은 피해 당사자나 그 유가족의 책임이 되었다.

처벌은 주로 금전적 보상이나 무법자 지정이 판결되었으며, 가장 무거운 형벌은 무법자 지정형과 3년간 추방형이었다. 무법자가 되면 모든 재산권을 잃었고, 누구든지 무법자를 죽여도 처벌받지 않았다. 추방형을 받았으나 아이슬란드섬을 떠나지 않은 사람도 무법자가 되었다.

4. 관련 문서



[1] 중세 아이슬란드는 아이슬란드 사가 중 하나인 흐라프켈 사가(Hrafnkels saga)에서도 무신론자 주인공이 나올 정도로 무신론이 꽤나 보편적이었다.[2] 물론 노예 제도가 있긴 했지만, 결혼하는 것과 아이를 가지는 것까지도 허락되었다.[3] 다만 하랄 1세 하르파그리는 실존한다는 증거가 빈약해, 13세기 노르웨이의 지배를 받던 아이슬란드인들이 만들어낸 존재이거나 노르웨이의 왕이었더라도 노르웨이의 서부 지역을 다스리는 소왕(小王)이었을 것이라는 게 정론이다.[4] 이 문제는 이후 1005년 단순 다수결에 기반한 항소재판소인 ‘다섯째 재판소’가 만들어지면서 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