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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D6D6><colcolor=#000>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베베른 공작 아우구스트 빌헬름 August Wilhelm, Herzog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Bevern | |
이름 | 아우구스트 빌헬릉 (August Wilhelm) |
출생 | 1715년 10월 10일 브라운슈바이크 |
사망 | 1781년 8월 2일 (향년 65세) 슈체친 |
아버지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에른스트 페르디난트 |
어머니 | 쿠를란트의 엘레오노레 샤를로테 |
자녀 | 크리스티네 조피, 프리데리케, 게오르크 루트비히,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아나 마리, 프리드리히 카를 페르디난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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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의 장성. 베베른 공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유능한 장성으로서 활약했으나 브레슬라우 전투 이후 대왕에게 신임을 잃고 한직을 전전했다.2. 일생
2.1. 초기 경력
베베른 공작은 1715년 10월 10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공작 에른스트 페르디난트의 아들이었다. 1725년에서 1730년 사이, 그의 아버지는 그를 발켄라이드의 수렵용 파빌리온 관리자로 임명했고 1731년 6월 24일 칼크슈타인 보병대 대위로서 프로이센군에 입대하게 했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던 1734년, 베베른 공작은 라인강 전선에 참가하여 형 밑에서 소령으로 활동했고 1735년 5월 5일에 중령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740년 7월 30일에는 대령으로 승진했다.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년 4월 10일, 베베른 공작은 몰비츠 전투에 참전해 최선을 다해 싸워 프로이센군의 승리에 기여했으나 도중에 부상당했다. 그후 1741년 6월 8일에는 화승총 연대의 지휘관이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머스켓 연대 지휘를 맡았다. 이후 그가 이끄는 군대는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보병대로 알려지게 된다. 1742년, 베베른 공작은 브리크와 나이세 요새 포위전에 참가했고 그해 5월 12일에 소장으로 승진했으며, 6월 4일 휘하 보병대를 이끌고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 참가해 프로이센군의 승리에 기여했다.1746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그는 비로소 공작이 되었다. 같은 해 3월 13일, 그는 슈테틴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1747년 7월엔 슈테틴의 주지사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1750년 5월에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검은 독수리 훈장을 수여받고 기사로 봉해졌다.
2.3.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한 1756년 8월에 프리드리히 대왕이 작센 침공을 감행했을 때, 베베른 공작은 17개 보병대대, 50개 기병대대로 구성된 좌측 군단을 이끌었다. 그의 군단은 뤼벤으로 진군한 후 루사티아를 통과했다. 이후 피르나 근처의 엘베 강 북쪽 로멘으로 진군한 베베른 공작은 9월 10일 도베르젠의 고지에 진을 쳤다. 이후 9월 22일까지 엘베강을 도하해 제히스타에 진을 친 그는 9월 23일 키스 공작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의 휘하에 배속되어 보헤미아 국경을 향해 행진했다. 10월 1일, 베베른 공작은 로보지츠 전투에 참여하여 좌익의 제1 전선에 소속된 보병대를 이끌고 거듭된 시도 끝에 로보지츠 마을을 점령하는 데 성공해 프로이센군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0월 2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베베른 공작을 남쪽으로 파견하여 츠지츠코위츠를 점령하게 했다.1757년 3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까지, 베베른 공작은 1만 4천 명의 병력과 대포 24문을 이끌고 보헤미아 국경 지대에 위치한 프리틀란트, 그로타우, 크럼바흐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시위를 벌였다. 그해 봄,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보헤미아 침공 작전에 참가하여 4월 20일 8천 보병대와 5천 기병대를 이끌고 그렌슈타인으로 진입해 라이헨베르크로의 진로를 확보했다. 4월 21일 새벽, 베베른 공작은 라이헨베르크로 진군하여 그곳을 수비하고 있던 쾨니히제크 백작 크리스티안 모리츠의 오스트리아군과 라이헨베르크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쾨니히제크 백작은 남쪽으로 퇴각했고, 베베른 공작은 진군을 재개해 4월 24일 터노프로 진군하여 쿠르트 크리스토프 폰 슈베린 장군의 군단과 접촉했다.
5월 6일 프리드리히 대왕과 만난 베베른 공작은 같은날 프라하 전투에 투입되어 중앙의 제1 전선에 배치된 보병 여단을 지휘해 막심한 피해를 감수한 끝에 오스트리아군을 프라하 요새로 밀어넣는데 기여했다. 5월 17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2만 병력을 이끌고 프라하로 접근하고 있는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를 저지하게 했다. 그러나 병력이 열세한 베베른 공작은 퇴각해야 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6월 13일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베베른 공작과 합세했다. 이후 6월 13일에 벌어진 콜린 전투에서, 베베른 공작은 우익 보병대를 이끌었으나 아군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작센을 향해 퇴각했고 베베른 공작의 군단은 7월 말까지 바우첸에 배치되었다.
8월 25일 본국으로 귀환한 프리드리히 대왕을 대신해 프로이센군을 지휘한 베베른 공작은 9월 7일 모이 전투에서 패배를 면치 못하고 브레슬라우에서 필사적으로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11월 22일 브레슬라우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후 공작은 야음을 틈타 브레슬라우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하고 11월 24일 동이 틀 무렵 전진 초소를 방문하던 중 오스트리아 경기병대에게 체포되어 오스트리아로 끌려 갔다. 베베른 공작은 빈으로 옮겨졌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모친이 그와 사촌지간이었기 때문에 몸값을 지불하는 일 없이 1758년 5월에 돌려보내졌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가 의도적으로 적에게 사로잡혔다고 여겼고, 그가 돌아오자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슈테틴으로 가서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라! 거기에 있는 쓸모없는 수비대를 통솔하라. 너에게는 그보다 더 나은 자리도 없을 것이다.
그후 베베른 공작은 포메른에 주둔한 스웨덴군과 상대하는 소규모 프로이센 보병대를 맡았다가 1762년 프리드리히 대왕의 야전군으로 귀환하여 그해 8월 16일 라이헨바흐 전투에 참가하여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하는 데 한 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