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아르샹보 드 푸아 Archambaud de Foix | |
생몰년도 | 미상 ~ 1419년 9월 19일 | |
출생지 | 가스코뉴 공국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몽뜨흐 | |
아버지 | 아르샹보 드 그레일리 | |
어머니 | 이자벨 드 푸아카스텔봉 | |
형제자매 | 장 1세, 가스통 1세, 마티외, 피에르 | |
직위 | 나바유 남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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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유 남작. 백년전쟁 시기 부르고뉴파에 가담했다가 용맹공 장과 함께 피살되었다.2. 생애
아버지는 부흐의 카프탈(Captal, 특정한 주의 최고 영주)로서 가스코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르샹보 드 그레일리였고, 어머니는 카스텔봉 자작인 로저베르나르 2세 드 푸아카스텔봉의 딸인 이자벨이었다. 형제로 장 1세 드 푸아, 가스통 1세 드 푸아그레일리, 마티외, 피에르[1]가 있었다. 그는 베아른 자작령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인 나바유 남작에 선임되었다.1407년부터 프랑스에서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가 맞붙었을 때, 그는 다른 푸아 가문 구성원들과 함께 부르고뉴 파에 가담했다. 1409년 2월 12일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에게 정식으로 고용되었고, 1410년 남동생 마티외와 함께 용맹공 장의 고문이자 시종으로 임명되었다. 1418년 9월, 용맹공 장과 도팽 샤를의 화해에 목표로 하는 협상에 부르고뉴 측 대표로 참여했고, 이는 생모르 협약으로 마무리되었다. 9월 13일 샤를 1세 드 부르봉, 필리프 드 생폴과 함께 양측 대표자들이 모인 샤랑통 회의에 참석했다.
1419년 9월 10일, 그는 용맹공 장이 지정한 10명의 영주 중 한 명으로서 몽뜨흐 다리에서 도팽 샤를과의 회담에 동행했다. 이후 아르마냑파 기사들이 용맹공 장을 기습 공격해 살해했을 때, 그는 급히 뛰어가서 기욤 2세 드 나르본이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머리에 도끼를 맞아 치명상을 입었고, 9월 19일에 몽뜨흐 성채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몽뜨흐의 노트르담 성당에 안장되었다. 1420년 부르고뉴파가 몽뜨흐를 탈환한 후 새로운 부르고뉴 공작인 선량공 필리프는 6월 24일 밤에 용맹공 장과 아르샹보의 유해를 발굴해 1421년 7월 12일 샤르트뢰즈 드 샹몰 성당에 안장했다.
[1] 1386 ~ 1464, 아를의 대주교이자 추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