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데마르 피멘타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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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13대, 17대 |
이름[1] | 아데마르 피멘타 (Adhemar Pimenta) |
생년월일 | 1896년 4월 12일 |
사망년월일 | 1970년 8월 26일 (향년 74세) |
국적 | 브라질 연방공화국 |
출신지 | 브라질 합중 공화국 히우지자네이루 |
신체조건 | 불명 |
감독 | 방구 AC (1934-1936) 마두레이라 AC (1936-1937) 상크리스토방 AC (1936-1937) 브라질 대표팀 (1936-1938) 마두레이라 AC (1939) 보타포구 FR (1940-1942) 브라질 대표팀 (1942) 산투스 FC (1943) 봉수체수 FC (1943) 봉수체수 FC (1945) 상크리스토방 AC (1947) 아메리카 FC (1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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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전 축구 감독2. 생애[2]
2.1. 감독 생활
2.1.1. 클럽
아데마르는 축구 선수로는 군소 클럽에서 뛰었고 체육 스포츠 협회의 기술 이사였다. 그러다 1934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소속의 방구 AC에서 감독 커리어의 스타트를 끊었다.아데마르는 1936년 마두레이라의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준우승을 이끌며 명성을 얻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마두레이라의 클럽 역사상 최고의 성적이다.
그는 1948년까지 여러 클럽에서 감독직을 수행했는데 산투스 FC에서는 선수들과의 마찰로 인해 팀에 오래 있지 못하기도 했다.
2.1.2. 국가대표
1936년 브라질 대표팀의 감독이 된 아데마르는 1937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브라질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브라질에게 이 대회는 여러모로 아쉬운 대회였는데 단일 리그 최종전 아르헨티나전에서 비겨도 우승이었지만 엔리케 가르시아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는 바람에 0대1로 패해 최종전까지 치러야 했다.[3] 그리고 아르헨티나와의 최종전 겸 리매치에서 연장전에 비센테 데라마타에게 두 골을 얻어맞고 패했다.1938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당시만 해도 역대 최고의 성적인 3위를 기록했지만 아데마르는 무수한 욕을 얻어먹어야 했다. 역대급 난투극에 재경기까지 치르고 올라간 혈전의 승리 이후 치러진 4강 이탈리아전. 아데마르는 부상 회복 겸 체력 안배를 이유로 브라질의 에이스이자 공격의 핵 레오니다스를 뺐다가 이탈리아에 1대2로 패했기 때문이었다. 레오니다스가 다시 출전한 3, 4위전에서 레오니다스가 2골을 넣어 브라질이 3, 4위전을 승리하자 4강전에서 레오니다스를 굳이 뺐어야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브라질 내에서 뜨겁게 지펴졌다. 레오니다스가 없어도 이탈리아를 이길 수 있었다는 아데마르의 오만이 브라질의 결승 진출을 막았다는 논란의 결과는 지금까지도 나지 않고 있지만 어쨌든 아데마르는 월드컵이 끝난 후 브라질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아데마르는 1942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다시 브라질 대표팀을 이끌었고 브라질은 3위의 성적을 거뒀다.
2.2. 이후
아데마르는 축구 감독 생활을 끝내고 라디오 축구 중계 해설자로 일했다.그의 해설자 생활은 1966년 월드컵까지 진행되었다. 결승전 중계 도중에 건강에 이상을 느낀 아데마르는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고 그렇게 해설도 그만두었다.
아데마르는 1970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3. 뒷이야기
- 아데마르는 클럽팀 감독직을 수행하며 주 대표팀 감독직도 겸임했는데 당시 인종차별이 꽤 심했던 브라질 축구계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낸 적이 있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흑인 선수들이 주 대표팀에 더 많이 참가해야된다고 주장했다.
4. 수상
4.1. 국가대표
- FIFA 월드컵 3위 1회: 1938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