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uk Patinggi Tan Sri Datuk Amar Haji Adenan bin Satem
1944. 1. 27. ~ 2017. 1. 11. (향년 72세), 말라야 연방 사라왁 쿠칭[1] 출생.
1. 개요
사라왁 주의 전 총리이자, 사라왁 인민에게는 사라왁의 아버지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지명도 높은 영웅이었다.2. 생애
1944년 쿠칭에서 태어났다. 말레이인과 믈라나우인의 혼혈로 전형적인 부미푸트라이며 무슬림이다. 성 요셉 초등학교와 동명의 중학교를 나왔으며, 졸업 후 언론인과 교사로 일하다가 호주의 애들레이드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치안판사로 임명되어 일하다가, 이후 1차산업부의 차관보로 일했다.3. 정치
1976년 통일부미푸트라유산당(PBB)의 법무보좌관으로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79년 사마라한 시의 무아라투앙 지역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2006년까지 무려 '27년(!)이라는 긴 세월을 있었다. 그러나 곧 고향인 쿠칭으로 돌아왔고, 이후 인도네시아와의 접경지대인 탄중다투 지역의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1년만에 내려왔다.4. 총리
2014년 무려 33년(!)을 장기집권한 압둘 타입 마흐무드가 사임한 뒤로 총리직을 물려받았으며, 이후 타입은 총독에 오른다. 동년 "다툭 파팅기" 칭호를 얻었으며, 2016년 총선에서 PBB가 속한 국민전선(BN)의 승리로 승승장구한다.한마디로 말레이시아판 티베트 또는 위구르가 되어버린 사라왁 주에서 총리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식민지 제독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지만, 그는 최대한의 한도에서 사라왁의 자치를 위한 노력을 했다. 이미 될 대로 말레이시아 본토의 물을 먹은 사라왁이 더 이상 본토의 물을 먹지 말고, 사라왁 고유의 색을 지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한편, 석유 로열티를 5%에서 20%로 수치를 높이는 한편 UEC를 정식 학위로 인정하지 않는 말레이시아의 교육제도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말레이시아 연방정부가 사라왁에 행한 악행들은 수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더더욱이나 지역 정당들이 BN에 가입하고 이 중 일부가 시대의 흐름에 맞춰(?) 조국을 팔아먹고 말레이시아를 노골적으로 추종하는, 쉽게 말하자면 한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또는 홍콩의 친중파와 같은 세력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당장 1973년 이후 본토는 사라왁을 어떻게든 본토로 동화시키고자 폭력도 서슴치 않았으며, 이 와중에 압둘 라흐만 야쿱과 같은 반역자들도 속출했다. 이후 그 누구도 사라왁의 자치를 위해 투쟁한 이는 없었다. 그러나 아데난은 사라왁의 자치를 위해 열렬한 투쟁을 벌인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였으며, 덕분에 사라왁 인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5. 사망
2017년 1월 11일 오후 1시 42분 사마라한의 사라왁 심장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72세. 유해는 쿠칭의 사마리앙 무슬림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라왁 인민들의 추모가 이어졌으며, 나집 라작 연방총리도 애도를 표했다.6. 평가
사라왁의 역대 총리들 중에서는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사라왁의 자치를 위해 투쟁했으니 당연한 일. 이러한 자치 정책 덕에 "아데난이 사라왁의 독립을 추진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까지도 나돈 적이 있었다.인접한 사바의 주수상인 무사 아만과도 종종 비교되나, 무사와 아데난을 비교하는 것은 아데난에게 있어 모독이다. 무사는 사바의 자치는커녕 본토화를 추진하고, 사바를 팔아먹는 원흉이라 되려 까이고 있다.
7. 비판
그러나 이러한 영웅에게도 비판은 따른다. 일단 이 사람은 강력한 자치를 위해 노력했지만, 독립에는 원천반대를 했던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독립 관련 소문에 대해서도 본인은 "분리독립을 추진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으며, 이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더더욱이나 자치화를 요구했던 사람이, 연방정부의 여권연합인 BN 내에서 활동하고, 한편으로는 본토를 위해 활동했던 전력이 있어서 이는 크게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