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5 06:44:28

시칸다르 칸 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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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치세
2.1. VS 토마르 왕조 (괄리오르)2.2. 샤리아의 보편화 시도
3. 기타

1. 개요

우르두어: سکندر لودھی
힌디어: सिकन्दर लोदी
영어 Sikandar Khan Lodi

재위 1489년 7월 21일 ~ 1517년 11월 21일
생몰 1458년 7월 21일 ~ 1517년 11월 21일
델리 술탄국의 30대 술탄. 부친에 버금가는 28년 간의 안정적인 통치로 로디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술탄이다. 괄리오르의 토마르 왕조와 17년에 걸치 대규모 전쟁 끝에 그 영토의 상당 부분을 정복하여 델리 술탄국의 영토를 투글루크 왕조 이후 최대로 확보하였다. 1503년 시칸다르 칸이 괄리오르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건설한 도시 아그라는 오늘날까지 북인도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2. 치세

발룰 샤의 차남으로, 왕자 시절에는 니잠 칸이라 불렸다. 장남은 아니었지만 총명하여 후계자로 지목되었고, 부왕의 사후 형을 지지하는 세력을 누르고 즉위하였다. 부왕과 마찬가지로 내부를 안정적으로 다스린 그는 벵골 술탄국의 알라웃딘 후세인 샤와 동맹을 맺어 동방을 안정시켰다. 상대적으로 조용하던 시칸다르의 치세에 있어 주요 사건은 남쪽 괄리오르를 중심으로 한 토마르 왕조와의 전쟁이었다.

2.1. VS 토마르 왕조 (괄리오르)

파일:괄리오르1.jpg
라잔 만 싱이 세운 괄리오르 성채

1390년대에 괄리오르 일대에서 자립한 라지푸트계 토마르 왕조는 한세기 간 자치를 누리다 1480년경 자운푸르 술탄국을 멸한 델리 술탄국과 접경하게 되었다. 당시 신임 마하라자 만 싱은 발룰 샤에게 80만 탄카를 바치며 복속하였는데, 1500년 그는 델리에서 시칸다르를 폐위하려는 모의에 실패한 일당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시칸다르는 반역자들을 받아내고 영토를 확장하려는 의도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1501년 시칸다르는 토마르 왕조의 속령인 돌푸르를 점령하였고, 그 군주 비나야카 데바는 괄리오르로 달아났다. 그후 시칸다르는 괄리오르로 향하기 위해 참발 강을 넘었는데, 그 직후 진중에 역병이 퍼져 회군하였다. 그틈에 만 싱은 선물과 함께 아들 쿤와르 비크라마디타를 인질로 보내며 휴전을 청하였고, 비나야카 데바에게 돌푸르를 돌려주는 대가로 망명자들을 추방하겠다 약속하였다. 시칸다르는 이를 수용하였고, 평화가 회복되었다.

다만 시칸다르는 괄리오르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않았고, 1503년 델리에서 괄리오르로 향하는 거점지에 신도시 아그라를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 시칸다르는 괄리오르 서쪽의 만드라얄 성채를 점령하고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진중에 역병이 돌아 재차 델리로 회군하였다. 그후 시칸다르는 아그라에 주둔하며 군대를 재정비한 후 1505년 재차 돌푸르를 점령한 후 지하드를 선포하며 괄리오르로 나아갔다. 그해 9월부터 1506년 5월까지 델리 군대는 괄리오르 인근 지역을 초토화시켜 도시를 고립시켰다. 하지만 만 싱이 괄리오르 성채에서 농성하며 치고 빠지는 전술로 포위군을 공격하자 보급난에 시달리게 된 시칸다르는 결국 포위를 풀고 후퇴하였다. 아그라로 퇴각하던 델리 군대는 자트와르에서 만 싱의 매복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3번에 걸친 실패에도 시칸다르는 괄리오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다.

시칸다르는 전략을 바꿔 괄리오르 자체를 공격하는 대신 인근 거점들을 차례대로 점령하기로 하였다. 이미 돌푸르와 만드라얄이 델리 령이었기에 1507년 2월, 시칸다르는 괄리오르 남쪽의 우디트나가르를 점령하였다. 같은해 9월에는 괄리오르와 같은 토마르 가문의 왕공이 다스리는 날와르[1]를 포위하여 1년 간의 공방전 끝에 함락하였다. 1508년 12월 시칸다르는 날와르를 라즈 싱 카츠차와하에 맡기고는 괄리오르 동남쪽의 라하르에 진영을 세워 몇달간 주둔하며 일대를 평정하였다. 다만 이번에는 펀잡 방면의 문제로 또다시 회군해야 했고, 시칸다르는 1516년 다시 괄리오르로 진격하려 했으나 와병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같은해 숙적 만 싱이 사망하였고, 시칸다르 역시 1517년 11월 병사하며 십수년간 이어진 양측의 대결은 막을 내렸다. 다만 4차례에 걸친 시칸다르의 괄리오르 원정은 토마르 왕조를 현저히 약화시켰고, 마침내 1523년 괄리오르는 이브라힘 칸에게 정복된다.

2.2. 샤리아의 보편화 시도

힌두교도 모친을 둔 시칸다르는 자신의 무슬림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강력한 수니 이슬람 정책을 폈다. 그는 힌두 사원들을 파괴하였고, 울라마의 압력 하에 힌두교가 이슬람만큼 고결하다 주장한 브라흐민의 처형을 허가하였다. 이슬람에 있어서도 정통 교리와 위배된다고 여긴 무슬림 성인들의 무덤에 순례와 (가즈니 왕조 시기에 힌두스탄으로 진군하다 전사한) 성인 살라르 마수드[2]의 창에 대한 연례 숭배 행사도 금하였다.
본래 델리 술탄국의 사법 체계는 대도시에만 이슬람 판관인 카지가 있었고, 소도시나 시골의 경우에는 현지 관료들이 재판을 해왔다. 술탄의 경우에는 이슬람 법학자들과 샤리아를 논하였다. 이에 시칸다르는 무슬림이 다수인 지방 도시들에 샤리아 법정을 세웠고, 카지 양성도 권장하여 이슬람법의 적용을 보편화하려 노력하였다. 카지들은 무슬림 뿐만 아니라 비무슬림들에 대해서도 재산권 등 비종교적인 부분에 대해 판결할 수 있었다.

3. 기타

파일:시칸다르 샤.jpg
로디 정원의 여러 영묘들 중 유일하게 술탄의 것으로 증명된 시칸다르 영묘

개인적으로 시칸다르 샤는 페르시아어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시인이었고, 9천 편의 시구를 남겼다.

[1] 괄리오르와 말와 술탄국 사이에서 주종관계 오고가던 곳. 현 마디아프라데시 북부의 병목지에 해당[2] 처음으로 이슬람 군대와 함께 힌두스탄에 깊숙히 진격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