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9 15:23:32

시모노세키역 무차별 살상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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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건 경위3. 범인의 인물상4. 재판5. 기타6. 유사 사건

1. 개요

下関通り魔殺人事件[1]

1999년 일본에서 일어난 무차별 살상 사건.

2. 사건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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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9월 29일 오후 4시 20분경 시모노세키역 동쪽 역사 유리창이 깨지면서 흰색 마쓰다 패밀리아[2] 한 대가 역 구내 통로로 돌진했다. 이 차량은 그대로 역 구내 약 60m 가량을 질주하면서 행인 7명을 치었다. 차량이 돌진한 곳은 매점과 식당 등 상업시설이 밀집된 데다 하교 중이던 학생들과 외근 중이던 회사원들 등의 통행이 많아 붐비는 상태였기 때문에 피해가 더 컸다. 이윽고 차량은 개찰구 근처에 정차했고 뒤이어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운송업에 종사하던 우와베 야스아키(上部康明, 사건 당시 35세)라는 남성이었다.

우와베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식칼을 휘두르면서 개찰구를 통과했는데 그대로 2층 승강장으로 올라가면서 도중에 1명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그리고 승강장에 도착한 그는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덤벼들어 7명에게 무차별적으로 상해를 입혔고 4시 30분경 역무원에게 제압되어 그대로 철도경찰대에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우와베의 범행으로 인해 5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체포된 후 그는 범행 동기에 대해 "사회에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나 죽여버리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또 이케부쿠로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3]을 의식하고 저지른 범행이며 이케부쿠로 사건처럼 칼을 사용하면 대량살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차량을 이용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도 진술했다.

3. 범인의 인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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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베 야스아키는 1964년 시모노세키시 북부에 인접한 토요우라정[4]에서 태어났다. 성실한 노력가 타입이었던 그는 비록 한 차례 재수를 하기는 했지만 명문대인 큐슈대학 건축학과에 진학하였으나 대학 입학 이후부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한다고 믿게 되었다. 대인공포증이 발병한 것이다. 대학 졸업 이후에도 우와베는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싫다며 취직하지 않고 지냈지만 1987년부터 1988년에 걸쳐 정신과 치료를 받고 이후 1급 건축사 자격을 취득했다.

1989년부터 후쿠오카시의 한 설계사무소에서 일했으나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1992년에 퇴직해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세우고 이듬해인 1993년에 결혼했다. 아내는 원래 보모 일을 하고 있었지만 결혼 후 2급 건축사 자격을 취득해서 남편 우와베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순탄하던 인생이었지만 1997년을 전후로 우와베의 대인공포증과 이로 인한 대인관계 불안으로 실적부진에 빠진 설계사무소는 경영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다음해인 1998년에 사무소를 폐업하였다.

사무소 폐업 이후 우와베는 신혼여행지였던 뉴질랜드 이민을 생각했는데 이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98년 2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때 아내를 후쿠오카에 혼자 남겨두고 간 탓에 아내는 동년 6월에 혼자 뉴질랜드로 건너갔고 그는 아내를 기다리면서 1999년 1월부터 영업용 트럭을 구매해 운송업으로 전업했다.[5] 하지만 1999년 6월 귀국한 아내는 우와베와 더이상 결혼 생활을 계속할 자신이 없다면서 이혼을 통보했고 갑작스러운 이혼 통보에 놀란 그는 뉴질랜드에서 함께 살자고 설득했지만 결국 아내가 이혼을 고집하여 결렬되었고 그대로 이혼했다.

이혼 후에도 그는 혼자서라도 뉴질랜드로 이주할 생각에 밤낮없이 일했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9월 24일 몰아닥친 태풍으로 인해 생계 수단인 트럭이 침수되어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 자신은 뭘 해도 안 된다고 생각한 그는 점차 의욕마저 잃어 갔고 아버지에게 자금 지원을 부탁했지만 아버지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이 일련의 사건들로 우와베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은 모두 주변의 책임이라고 믿게 되었고 그 믿음은 점차 부모와 사회에 대한 증오로 변해 갔다. 그리고 사회에 큰 타격을 준 후에 자신도 죽겠다는 생각으로 렌터카를 빌려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6]

4. 재판

우와베는 체포된 이후 경찰 조사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등 알 수 없는 말을 되풀이하고 괴성을 지르며 반항하는 등 기행을 보였다. 이 때문에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연기하는 것으로 의심되어 정신감정이 진행되었다. 우와베의 변호인 측이 제시한 감정 결과는 조현병에 가까운 망상장애로 인한 심신미약 내지 심신상실 상태였으나 검찰 측 감정 결과에 따르면 인격장애에 기반한 우울증 증세가 반복되고 있으나 형사책임능력에는 영향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검찰은 이 감정 결과를 기반으로 우와베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검찰과 변호인 측의 정신감정 결과가 엇갈린 가운데 2002년 9월 20일 야마구치 지방법원은 1심 재판에서 검찰 측의 정신감정 결과를 토대로 우와베의 형사상 책임능력을 인정해 "역사상 보기 드문 흉악한 범죄이다. 범행 동기에 대한 참작의 여지가 없다"는 논지로 사형을 선고했다. 우와베는 이에 항소했으나 기각되어 2005년 6월 28일 히로시마 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에서도 사형이 선고되면서 원심 판결을 유지했다. 그는 최고재판소에 상고했지만 2008년 7월 11일 최고재판소는 우와베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선고하여 최종적으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결국 2012년 3월 29일에 우와베는 사형에 처해졌다. 향년 48세. 우와베는 사형당하기 전에야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며 죽은 피해자와 다친 피해자에게 사죄했다.

5. 기타

우와베가 차량을 몰고 돌진했던 시모노세키역 동쪽 역사는 사건으로부터 약 7년이 지난 2006년 1월 방화로 소실되었고 이후 역 주변이 재개발되면서 이에 맞춰 새 건물로 다시 지었기 때문에 사건 당시와는 개찰구 위치와 형태 등이 완전히 달라졌다.

범인이 차량으로 돌진해서 사람들을 친 뒤 흉기난동을 벌이는 범행 수법이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상사건과 완전히 동일하다. 참고로 아키하바라 사건은 시모노세키역 사건으로부터 9년 후인 2008년에 발생했다.

6. 유사 사건


[1] 시모노세키 묻지마 살인사건[2] 범인 소유의 차량이 아니라 렌터카였다.[3] 시모노세키역 사건으로부터 약 3주 전인 1999년 9월 8일 이케부쿠로에서 일어난 무차별 흉기난동 사건. 23세 남성 조타 히로시가 행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 60대와 20대의 여성 2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4] 2005년 시모노세키시에 합병되었다.[5] 여기에는 이주 자금 마련도 있지만 사람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편하다는 이유도 있었다.[6] 당초에는 범행 일시를 10월 3일로 잡았으나 범행 당일 아버지가 침수된 트럭을 폐차시키라고 하자 이 와중에 귀찮게 무슨 폐차 처리 절차를 해야 하냐는 생각에 화가 나 계획을 급히 변경했다고 한다.[7] 이 사건의 경우 범인이 차량을 몰고 질주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낸 점은 같지만 흉기 난동은 미수에 그쳤다는 차이가 있다. 정확히는 차량 질주 후 자전거 보관함을 들이받고 멈춘 뒤 여중생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였으나 시민들에게 제압되면서 미수에 그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