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웨덴 동인도 회사(Svenska Ostindiska Companiet)는 1731년에 민간 회사에 의해 설립된 스웨덴의 동인도 회사이다.주로 청과의 무역을 중시했다. 예테보리를 본거지로 하였다 이덕에 예테보리는 대동양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요 상품은 후추,향신료,실크,차,가구,도자기,보석 등 사치품이었다. 인도와 중국과의 무역으로 스웨덴에 새로운 관습을 도입시킬 정도로 문화적 영향력이 컸고 차,쌀,아락, 새로운 뿌리 채소가 스웨덴 가정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스웨덴에서 가장 큰 무역 회사로 성장했다. 37척의 배로 총 132번의 탐험이 수행되었다. 비록 1813년에 회사는 문을 닫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테보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당시 스웨덴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의 식민지 전쟁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2. 배경
스웨덴은 동인도 무역에 참여한 주요 유럽 국가 중 가장 마지막으로 동인도 무역에 뛰어들었다. 스웨덴 동인도 회사의 왕족 특권은 다른 유럽 무역 회사가 설립된지 거의 1세기가 지나서야 부여되었다.17세기에 동인도 무역이 시작되면서 중국과 인도산 상품이 스웨덴에 수입되었다. 차, 인도식 옷, 중국 물건 등이 스웨덴 사교계와 중산층 사이에서 유행이 되었다. 문화, 철학, 예술, 농업, 건축 양식또한 연구되었다. 두드러진 예로는 드로트닝홀름의 중국관이 있다. 이러한 풍조는 18세기에 스웨덴 과학자와 정치인들이 스웨덴이 중국식 임금이 이끄는 지식인 관료인 만다린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2.1. 초기 시도
스웨덴 동인도 무역 회사를 설립하려는 첫 시도는 플랑드르 상인 빌렘 우셀링크스가 주도했다.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은 스웨덴 서해안에 새로 건설됬던 예테보리를 장악했다. 이 도시는 대부분의 상품이 배로 운송되었고 덴마크의 세관을 거치지 않고도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스웨덴의 주요 항구였기 때문에 스웨덴의 국제 무역에 이상적이라고 여겨졌다. 1626년 6월 14일, 우셀링크스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로부터 12년 동안 무역 회사를 운영할 왕실 특권을 받았다. 여기에는 외국의 토착민과의 무역 윤리에 대한 조항등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하는것이었다. 이 사업은 국왕을 포함한 여러 저명한 스웨덴인들의 지원을 받았으나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정치적 어려움과 스웨덴이 30년 전쟁에 참여했다가 국왕 구스타프 2세가 사망하자 계획은 종식되었다.무역 회사를 시작하려는 두번째 시도는 1661년에 어느 독일 상인이 시도했는데, 그는 북극해,북해,일본을 지나 중국 과 인도까지 가는 경로를 시도했다. 목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봉쇄를 우회하려는 것이었는데, 당시 기술력상의 문제로 이 계획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 후 1660년대 말, 런던 거주자이자 외교관인 조한 레존버흐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에서 18년간 일했던 올리 보그에 관해 스웨덴 국왕 칼 11세 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보그는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인도에 있는 덴마크 요새를 스웨덴에 넘길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스웨덴의 정치적 불안과 자금 문제로 좌절되었고, 1674년에 해산됐다.
이후 동인도에서 스웨덴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려는 시도는 마다가스카르에 해적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그들은 해적질로 부자가 됐고 정착해서 합법적인 사업에 발을 들이려 하고 있었다. 해적의 수는 약 1,500명이었고 상당히 강력한 함대를 자랑했다. 그들은 스웨덴 국왕 찰스 12세에게 보호를 위해 50만 파운드 스털링과 무장한 함선 25척을 제공하면서 사업을 시작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1718년, 해적들은 노르웨이와의 전쟁 중에 국왕과 다시 만났다. 새로운 계획은 해적들이 예테보리에 정착해 스웨덴 국기를 내걸고 동인도와 무역을 시작할 수 있다면 무장하고 물품을 실은 함선 60척을 제공하겠단 것이었다. 모건이라는 이름의 사략선장 한 명은 실제로 동인도 회사의 헌장과 그러한 사업의 결과가 될 수 있는 식민지의 총독으로 임명되는 편지를 받았다. 1718년 11월 30일에 왕이 총에 맞아 죽자 사업은 무산됐다.
2.2. 대북방 전쟁 이후
1727년 5월 국왕이 오스텐드 회사의 헌장을 정지하자 오스텐드 투자자들은 수익성을 내기 위해 동인도 무역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섰고 스웨덴에 눈을 돌렸다.스코틀랜드 상인 콜린 캠벨은 이전에 오스텐드 회사에서 활동했고, 1720년대 후반 암스테르담에 머물던 스웨덴인 니클라스 샬그렌을 만났다. 그들은 함께 스웨덴 무역 회사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지만, 캠벨이 그 기업의 원동력이란 것은 분명했다. 외국 투자자들은 스웨덴에서 의심을 받았기에 회사를 이끌어갈 존경받는 스웨덴인을 필요로했다. 그 사람은 독일 출신의 스웨덴인인 위원 헨리크 쾨닉이었다.
1729년 헨리크 쾨니히는 두 척의 선박에 대한 전세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전에 다른 신청자에게 주어진 전세에 대한 자신의 요청을 주장했지만 스웨덴 정부의 반응은 저조했다.하지만 빈 조약의 이후 영국의 압력에 의해 1731년 오스텐드 회사가 폐쇄되면서 무역과 정치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당시 상황에 스웨덴의 무역경쟁력이 저하되었다. 쾨니히는 이 문제를 스웨덴 의회에 가져가 끝내 회사 설립에 성공해 1731년 6월 14일에 회사에 대한 왕실 특권을 얻었고, 처음에는 딱 15년이라는 기한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