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1-12 00:12:30

손진형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봉(瑚烽)
본관 경주 손씨[1]
출생 1871년 7월 20일
경상도 경주부 강동면 오금리
(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오금리)
사망 1919년 7월 14일
중화민국 상하이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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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손후익·손학익 형제는 그의 조카이다.

2. 생애

손진형은 1871년 7월 20일 경상도 경주부 강동면 오금리(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오금리)에서 아버지 손최수(孫最秀, 1851 ~ 1918. 2. 1)와 어머니 순천 박씨 박한현(朴漢鉉)[2]의 딸 사이의 5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주부 서면 선동(현 경주시 건천읍 송선1리 선동마을)으로 이주했다.

그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이강년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하여 좌종사부에 소속되어 일본군에게 대항했다. 이후 1912년 2월 초 이용규(李容珪)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민족운동을 전개하다 그해 4월 6일 경찰에 체포되어 경주경찰서에서 4개월간 구속, 고문을 당했다가, 1912년 9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사기 취재,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고 방면되었다.

1914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지속했으며, 1915년에는 은밀히 귀국해 국내정세를 조사하고 군자금을 모집했다. 여기서 동지 민충식과 협의하고 국내 동지 규합에 합의한 뒤 교남교육회(矯南敎育會)를 지도하면서 청년층을 육성하였다. 1916년 7월 이용규와 함께 충청남도 논산군에 있는 이대수의 집에 가서 거사 동맹을 맺었지만 1917년 4월 9일 다시 체포되어 울릉도에 유배되었다가 1918년 8월 18일에 석방되었다.

1919년 3월 상하이에서 김창숙을 도와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파견에 힘을 보탰고, 4월 10일에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임시의정원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통위원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의 기본 방략을 세웠다. 그러나 1919년 7월 14일 과로로 상하이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손진형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낙선당파 20세 진(晋) 항렬.[2]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