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9 11:55:13

세토우치 해상납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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瀬戸内シージャック事件

1. 소개2. 위험한 남자들3. 전대미문의 해상납치4. 사건 이후

1. 소개

휴먼버그대학교에서 묘사된 과정
1970년 일본히로시마현에히메현 사이의 세토 내해에서 발생한 전대미문의 해상납치 사건.[1] 일본어로 해상 납치를 시잭(seajack, シージャック)이라고 칭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2. 위험한 남자들

사건의 발단은 1970년 5월 11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후쿠오카시에서 친구 두 명과 차를 훔친 20세 남자는 그 차를 타고 히로시마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기분을 낸 탓인지 규정속도를 위반했고 지나가던 경찰차에 의해 제지되었다. 젊은 남자들의 기색이 이상하다고 여겨진 경찰이 차량번호 조회를 의뢰해 보니 후쿠오카에서 도난된 차량이란 게 드러났고 경찰관들은 이들을 경찰서까지 연행하려 했는데... 문제는 경찰차도 같이 가야 했던지라 경찰관 한 명이 남자들 중 하나를 데려다 경찰차에 태웠고 다른 경찰관은 도난 된 차량에 젊은 남자 두 명과 함께 탑승해 경찰관이 직접 운전석에 앉았다. 앞에 있던 경찰차가 출발하고 나서 얼마 있다가 도난 차량도 출발하려는 순간 주범인 20세 남자가 품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그리고 경찰관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칼로 경찰관을 찌른 후 도주했다.

히로시마현 경찰은 발칵 뒤집혔고 도주한 두 남자를 잡기 위해 현 경찰력을 총동원했다. 한편 도망친 두 남자는 중간에 차를 또 훔쳐서 갈아타고 우베시에 도착해서 옷을 훔쳐 갈아입은 후 도망칠 방안을 모색하다가 히로시마역 인근의 히로시마 중앙 우체국에서 돈을 털어서 오사카 쪽으로 도주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히로시마역 바로 앞의 요코가와역에서 하차했지만 히로시마현 경찰이 엄중하게 경계하는 것을 보고 잡히지 않기 위해서 인근 산속에 숨어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다음날인 5월 12일 히로시마현 경찰본부에 권총을 든 두 명의 남자를 목격했다는 제보가 들어왔지만 둘을 목격했다는 곳은 복잡한 주택가라서 수색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두 남자는 가스배달 트럭을 세워서 운전수를 인질로 잡고 출동한 경찰을 위협했다. 결국 경찰은 운전사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총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고 주범인 20세 남자는 트럭 운전수를 끌고 그대로 도주했다. 하지만 주범이 들고 있던 권총은 전날 산속에서 노숙한 탓에 탄환이 비에 젖어서 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경찰은 인질의 안전을 생각해서 잡을 수 없었던 것. 한편 주범과 함께 있었다가 대치 과정에서 도망친 다른 남자는 근처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 결국 주범만 도망치게 되었다.

3. 전대미문의 해상납치

상황이 심각해지자 히로시마현 경찰은 언론에 이 사건을 공개하고 주범인 20세 남자를 뒤쫓았다. 트럭 운전수를 붙잡고 도주한 주범은 히로시마시 안에서 트럭에서 내려 다시 도주하다가 택시를 불러 잡았다. 주범은 택시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동료가 붙잡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히로시마항으로 가서 배를 타고 도망치려고 했다. 이에 먼저 리츠쵸에서 총포상으로 쳐들어가 주인과 고객들을 휴게실로 몰아넣은 뒤 소총 3정, 총탄 80발, 산탄 250발을 탈취한 후 히로시마항으로 들어갔다.

히로시마항에는 히로시마와 에히메의 이마바리시를 오가는 정기여객선 프린스호가 있었다. 주범은 소총으로 무장한 후 항구의 대기실로 난입해 총을 난사하고 프린스호로 뛰어들어 선장에게 "어디든지 좋으니 큰 도시로 가라!"고 위협했다. 배가 출발하려면 시간이 남아 있었으나 주범의 위협에 선장은 즉시 배를 출항시켰다. 이때 배에 탄 사람들은 선장을 포함한 승무원 11명, 승객 33명으로 총 44명이었다. 히로시마현 경찰은 프린스호 납치 사실을 알고 전 항구에 경찰들을 비상배치하는 한편 경비정을 출동시켜 프린스호를 뒤쫓게 했다.

전대미문의 해상 선박납치에 일본 언론들도 일제히 세토 내해로 몰려들었다. 덕분에 사건은 실시간으로 전일본에 생중계되었다. 당시의 취재 열기는 가히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 당시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현지의 주고쿠 신문이 취재를 위해 세츠나기를 대여해 프린스호에 근접하자 주범은 비행기 소리가 시끄럽다면서 소총을 발사했고 세츠나기에 명중해 자칫 잘못하면 추락할 뻔했지만 어찌어찌 버텨서 추락만은 면했다. 또 히로시마현 경찰의 경비정이 다가오자 경비정의 조타실을 향해 총을 난사해 조타실에 타고 있던 경찰관이 총을 맞아 부상을 입기도 했으며 프린스호 인근을 지나가던 고무보트에 탄 무고한 민간인 두 명에게도 발포하는 등 막장 행각을 이어나갔다.

한편 프린스호의 선장은 침착하게 주범에게 대응하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물었다. 범인이 지리시간에 졸았는지 이 근처에서 가장 큰 항구로 가자고 말하자 선장은 처음 구레항을 이야기했고 주범은 "구레항은 해상자위대 본부가 있어서 안 된다"고 거부했다. 결국 구레항 다음으로 큰 항구인 마츠야마항 쪽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마츠야마는 에히메현 소속이라 에히메현 경찰이 비상배치되었다. 통상적인 배의 속도라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겠지만 선장은 주범이 모르게 느린 속도로 마츠야마 쪽으로 향해 경찰이 대비를 할 시간을 벌어주려고 한것. 또한 선장은 주범에게 마츠야마에서 승무원과 승객을 풀어 줄 것을 부탁했고 주범도 생각해 보는 듯했으나 라디오 방송에서 마츠야마에 경찰이 비상배치되었다는 뉴스가 들려오면서 주범은 부두에 접항하지 못하게 하고 부두 인근 바다에서 배를 멈추게 했다. 만약 방송에서 경찰 배치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주범은 부두에 배를 입항시켰을 것이고 경찰이 제압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지휘계통의 혼란으로 언론에 보도규제 요청이 제대로 되지 않은 탓이었다.

인질들의 생명이 위기에 처했으나 선장이 기지를 발휘했다. 선장은 프린스호의 연료가 부족하다고 주범에게 거짓말을 했고 연료 보급이 필요하다고 설득하여 결국 오후 9시 40분 프린스호는 마츠야마 항구의 부두에 입항했다. 이때 주범은 자신이 배를 지키고 선장을 경찰들에게 보내 연료 보급을 요청하도록 했다. 경찰은 연료 보급을 해 주면 승객들은 풀어 줘야 한다고 조건을 제시하는 한편 연료를 보급하는 중에 경찰관들이 배에 잠입해서 주범을 제압하는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선장의 만류로 작전을 변경해 연료 보급 직원으로 경찰관 2명을 위장시켜서 배에 들여보낸 뒤 주범이 방심한 틈에 제압하려고 했으나 주범은 경계를 늧추지 않았고 경찰은 결국 주범을 제압하는걸 포기했다.

선장의 노력으로 다음날인 5월 13일 오전 12시 40분 배에 탄 33명의 승객들과 4명의 승무원들이 풀려났다. 그러나 주범은 남은 승무원들은 풀어주지 않았고 선장이 배에 오르자 12시 50분 마츠야마에서 출항했다.

그러나 입방정인 언론이 또 말썽을 일으켰다. 취재경쟁에 불붙은 언론이 일제히 연료 보급 중에 경찰관이 위장해서 범인을 제압하려다가 실패했다는것을 까발리면서 주범은 분개했고 경찰이 자신을 속였다면서 따라오던 경비정들을 향해서 총을 난사했다. 천만다행인지 이 상황에서 언론은 친절하게 연료가 충분하다는 것까지 보도했으나 경비정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느라 정신 없던 주범은 이 보도는 듣지 못했고 선장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간신히 넘길 수 있었다.

주범은 배를 히로시마항 쪽으로 돌리게 지시했고 프린스호는 히로시마항으로 향했다. 이런 가운데 경찰은 오카야마현에 살던 주범의 아버지와 누나를 데려와 주범을 설득하게 했으나 주범은 더욱 격분해 소총을 난사해 경비정의 경찰 한 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정찰 중이던 인근의 경찰 헬기에도 명중시켜서 경찰 헬기를 추락 직전까지 몰고 갔다.

가족의 설득까지 실패하자 결국 히로시마현 경찰은 저격수를 요청해 주범을 원거리에서 사살하기로 결정했다. 더 이상 명확한 목적도 없이 돌아다니는 주범을 내버려 두었다간 경찰과 무고한 민간인까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오전 9시경 프린스호는 처음 출항했던 히로시마항으로 돌아왔다. 주범은 뉴스를 듣고 경관을 찌른 것은 자신인데 잡힌 친구가 찌른 걸로 보도되었다고 친구들을 석방시키겠다면서 히로시마항으로 배를 돌리게 했던 것. 주범은 선장을 경찰들에게 보내서 자신의 친구들을 빨리 데려오라고 말했으나 경찰은 시간을 끌면서 주범을 제압할 작전 실행을 기다렸다.



9시 52분 주범이 소총을 내려놓고 갑판으로 나오자 오사카부 소속의 경찰 저격수가 주범의 가슴을 저격했고 주범은 그대로 쓰러졌다. 즉시 경찰은 프린스호로 진입해 주범을 배 밖으로 이끌었다. 주범은 병원으로 이송되어 응급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오전 11시 25분 사망했다. 주범이 저격당해 쓰러지는 순간은 히로시마 TV의 카메라가 고스란히 잡았고 전 일본에 방송되었다.

4. 사건 이후

히로시마현 경찰은 주범을 저격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으로 논란의 도마에 올랐다. 히로시마현 경찰본부장은 팔을 노린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진술했다. 일부에서는 요도호 납치 사건 이후 모방범의 발생을 막기 위해 사살이란 과격한 대응을 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으나 잘한 대응이라는 평가가 더 많았다. 주범을 사살한 저격수는 살인 혐의로 기소 여부가 논의되었으나 히로시마 지방경찰은 정당한 공무수행으로 인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불기소처분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일본 경찰은 범인에게 총격을 가하는 것에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가 범인이 되려 날뛰어 경찰이 위험해지는 부작용이 발생했고 2001년 일본 경찰은 경찰의 총기 사용 요건을 명확하게 규정하면서 총기로 범인을 제압하는 경우가 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어난 아사마 산장 사건은 범인들을 사살하지 않고 생포하게 했는데 이 사건이 영향을 준 건지는 불명확하다.

또 일본의 대테러 진압부대는 이 사건의 영향으로 범인을 사살하게 된다면 일제사격으로 사살하는 암묵적인 관행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한 저격수가 사살할 경우 벌어질 개인적인 심리 문제와 여러 법적 문제들을 고려한 관행이었다고 한다. 이후 1979년 미쓰비시은행 인질극 사건에서 대 테러 진압부대는 범인을 일제사격으로 사살했다.


[1] 이 사건이 워낙 큰 사건이라 한국에서도 보도될 정도였는데 이 사건으로부터 불과 한 달 전에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