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0:18:00

서진문

파일:서진문.jpg
성명 서진문(徐鎭文)
생몰 1900년 8월 25일 ~ 1928년 11월 17일
출생지 경상남도 울산시 동구 일산동
사망지 일본 요코하마
매장지 경상남도 울산시 동구 일산동 화정공원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서진문은 1900년 8월25일 경상삼도 울산시 동구 일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보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에 재학했지만 1923년 관동 대지진 직후 발발한 조선인 학살사건에 휘말려 중상을 입은 채 국내로 돌아왔다. 이후 울산에서 노동야학과 여성야학 교사를 지내던 그는 1925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김천해 등과 함께 조선인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서진문은 1926년 가나가와현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을 역임했고, 1927년에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 또한 그는 울산에 몇차례 방문해 재일조선인 노동조합 활동을 전했고, 일본에서 수재를 입은 동포들을 위해 구호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걸 지켜본 그는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1927년경 고려공산청년회에 가담했다.

그러나 1928년 10월 25일 쇼와 덴노 즉위식인 '어대전(御大典)’을 앞두고 횡빈경찰서 경찰들이 가나가와현 조선노동조합 황빈지부를 습격했고, 그를 비롯한 한국인 노동운동가 36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서진문은 심장 맥박이 105까지 올라갈 정도로 병세가 위급했다. 그래서 동지들은 서진문을 석방시켜서 병원에서 치료받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경찰은 이를 묵살하고 의사를 불러주지 않았다. 서진문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고통받다가 11월 16일에야 훈방 조치되었지만 이튿날 사망했다. 동아일보 1928년 12월 7일자 기사에 따르면, 그는 유치장 안에서 같이 검거된 동지들을 걱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무산계급 ○○만세! 얼른 리군을 구원하라! 나는 벌서 살아나지 못하겟다.”동아일보, 1928. 12. 7 보도기사 중

그의 장례식엔 재일조선인노동조합 인사들과 일본인 500여명이 참여했으며, 상여를 메고 화장장까지 약 4Km를 행진했다. 서진문의 유골은 1929년 1월 11일에 고향에 도착했고 다음날 울산 각사회단체연합 대표들과 보성학교 학생과 청년회원들이 운군해 일산동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기에 해방 후에도 반공 정서가 지배적인 대한민국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가 2006년에 비로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울산 동구청은 서진문의 묘소가 있는 화정공원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정돈하였다. 그리고 2018년 11월에 그의 서거 90주기를 맞아 시민단체 추모제가 열렸는데 동구청장 등이 참여했다.
울산 동구청은 2019년 묘소 주변을 넓혀 단장하고 8월 15일 묘역 입구에 서진문의 흉상을 만들어 세웠으며 공원 명칭을 '서진문공원'으로 변경하는 행정 절차를 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