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30 14:33:44

산동대전

산동대전
山東大戰
Great War of Shandong
시기 기원전 313년
장소 중국 산동 지방
원인 조선(朝鮮), 초(楚), 위(魏) 합종군의 제나라 패권에 대한 도전
교전국 조선朝鮮
초楚
위魏
진秦
작은 위衛[1]
제齊
한韓
송宋
작은 위衛
주周[2]
지휘관 조선상 무령군 조옹
대사마대장군 고질
하관상경 하기
우장군 비비오
부장 후타요
정동장군 곽전
잡호장군 악의

영윤 겸 상집규 경취

서하태수 경리
서수 공손연
장군 위장
부장 임홍

미현령 위염
부장 백기
대사마 광장†
제남군 원수 전거
제양현령 도도

장군 한거

송군 지휘관 없음[3]

작은 위(衛) 지휘관 없음[4]

주군 지휘관 미상(未詳)[5]
병력 조선군
- 북부군 : 20만명
- 남부군 : 10만명

초군
- 5만 5천명

위군
- 서하군 : 1만 8천명
- 하동군 : 2만 2천명
- 하남군 : 2만 7천명
- 대량주둔군 : 8천명

진군
- 2만 5천명
총합 약 45만
제군
- 중앙군 : 12만 6천
- 고당주둔군 : 6만 3천
- 수춘원정군 : 4만 4천
- 박릉주둔군 : 8천
- 제양방면군 : 약 5만
- 동군방면군 : 5만
- 교동군 : 4만 3천
- 제남군 : 2만 3천
- 그 외 기타 병력 다수

한군
- 민지주둔군 : 1만 4천
- 의양주둔군 : 2만 8천

주군
- 1만 2천

기타 송군 수송대 일부

총합 약 45만
피해 7만 2천여 명 사상 24만여 명 사상
결과 제나라의 대패
영향 조선이 최강국 자리를 쥐다.
제나라와 전인제 체제의 몰락
소진의 합횡책 구상

1. 개요2. 배경
2.1. 합종군의 사정2.2. 제나라의 사정
3. 전쟁의 개시
3.1. 수춘전투3.2. 위나라의 진격
3.2.1. 번외: 낙양전선
4. 합종군의 진격
4.1. 북부군(제북 전선)4.2. 남부군(동군전선)4.3. 삼천전선
5. 제수대전
5.1. 조선군의 진군5.2. 제수에서의 결전5.3. 대전 이후의 대응
6. 종전으로 가는길
6.1. 순우 전투6.2. 조선의 종전안 마련
7. 한단 회담8.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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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A작품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 상의 전투. 파촉을 제외한 열국 전부가 휘말리고 약 100만에 가까운 병력이 부딪힌 대전이다. 당시 중원의 양대 최강국이던 [6] 조선과 제나라가 국운을 걸고 각각 30만이 넘는 군세를 동원해 조선-제 전선에서의 전투만으로도 가장 많은 병력이 동원된 전쟁이기도 하다.

이 전쟁을 통해서 조선은 제북,임치,동군의 3개 군[7]을 얻어서 중원 최강국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동시에 30만이나 되는 대군세를 동원한 결과 오랜 기간 커다란 재정 부담에 시달리게 된다.

또한 위나라는 제나라령 동군을 얻어서 수도인 대량의 방비를 굳혔을 뿐만 아니라, 한나라에게서 요충지인 민지-의양(삼천 지방)을 얻어서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하지만 진나라는 초에 의해서 억지로 동원되었고[8], 초나라는 수춘 방어전에서 5만여 병력을 상대로 승리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얻은 게 제나라의 배상금과 인질밖에 없었기에 불만을 품었으며, 이는 차후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패배한 제나라는 수도 임치를 포함한 중요 지역들을 빼앗기며 중원 최강국의 칭호를 잃고 옛 노나라의 영역에 즉묵을 더한 정도로 쪼그라들었고, 한나라는 국력이 반토막 나다시피 하며 반쯤 종속에 가까운 형태로 위나라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된다.
전장이 되는 제북 지방의 지도

2. 배경

2.1. 합종군의 사정

중원대전 이후 약 50년간 제나라는 중원 열국의 균형을 맞추고 그 중재자로써 패권을 휘둘러왔다. 이는 제나라가 패자였던 시기에는 당연한 패자의 역할이었지만, 제위왕 전인제가 낙양 사건으로 주나라 천자와 결별하며 패자의 직분을 포기하고, 칭왕회동을 통해 제, 조선, 위, 한, 진의 5국이 다같이 칭왕한 뒤에도 제나라의 외교전략은 큰 수정이 없었다.

이 전략의 최대 피해자인 초나라[9]는 제나라의 저지를 뿌려치기 위해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또한 조선은 중원대전 이후에는 완전히 대외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져 외교관계를 상당부분 제의 중재에 의지하기도 하였지만, 중원대전 때의 배신으로 조선에 대해 뿌리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던 위혜왕 위앵이 사망하고 아버지가 조선인인 위래로 승계되고, 서하대전에서 조선이 위를 도와서 서하를 되찾는걸 도와줌으로써 외교적 페널티를 완전히 극복하였다. [10]

제가 패권을 쥔 동안 조선-제 상호간에는 오랜 우호관계로 인한 관성적인 신뢰가 뿌리내렸지만[11], 그 이면에서는 서서히 불만이 자라나고 있었다. 제 패권기 동안 조선은 요서도로 공사나 하간의 개발 등의 내정과 북방 유목민 문제에 집중하며 국력을 축적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일각에서 상승한 국력, 특히 제에 비해서도 한끝 우세하다고 자평하는 수준에 이른 군사력에 맞게 관계를 재편하길 바라는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칭왕회동에서 전인제에게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비는 수치를 당했던 조선장왕 기유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되갚아주기 위해서 벼르고 있었는데, 왕권이 열국 중에서도 특히 강한 조선에서 이는 제를 등지는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초나라에게 패배한 피해를 경감하고자 한 진혜문왕 영사의 계책대로 조선과 초가 만나서 제나라를 도모할 것을 결의했고, 1년 뒤에는 제나라로 인해서 하남 방면으로의 확장이 가로막힌 위나라까지 합류시킴으로써 제나라 합종군이 결성되었다.

2.2. 제나라의 사정

당시 제나라는 낙양사건 이후 패자의 지위를 잃고, 직후 발발한 월국부흥운동을 틈타서 자신들의 우호국인 한,송을 길러주기 위해서 도와주었던 화남대전에서 패배했다.

또한, 진나라가 초나라에게 패전해서 영향권으로 편입되는 것을 막지 못하고, 송나라가 강남에 남아있던 유일한 거점이던 수춘을 빼았기는 등 수세에 몰려 있었다.[12] 이런 상황에서 조선과 위의 이상행동을 감지했지만, 이는 결정적인 단서는 아니었고 그나마의 탐색 결과도 오판하면서 자신들의 과민반응이었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된다.

결국 제 조정에서는 더 급하고 확실한 위협(으로 보)이던 초나라에 신경 써야 하는데 오랜 동맹이던 두 나라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면서 양국에 대해서는 약간의 경계를 더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고, 공손석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초에게 빼앗긴 수춘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여기서 고당, 즉 조선 방면을 지키던 광장까지 초나라 공격에 쓰고자 했으나 당사자에게 거부당하고[13], 대신 위나라 방면을 수비하던 도도를 초나라 공격을 위해서 남쪽으로 재배치했다.

그리고 이 공격은 제나라 최대의 실책이 되었다

3. 전쟁의 개시

3.1. 수춘전투

기원전 313년 제나라는 사실상 속국이던 송이 빼았긴 수춘을 되찾기 위해서 도도에게 4만 4천의 병력을 주면서 수춘을 공격했다.[14] 초나라는 이 때 거듭된 전쟁으로 지쳐있었고, 병력이 분산되어 크게 불리해야했지만, 상주국 경취의 신들린 군사운용으로 각개격파 이전에 병력을 전부 결집시켜서 5만 5천의 군세를 모으는데 성공했고, 비록 재정 문제로 추격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제나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서 격퇴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제나라군은 결국 경취에게 아마 올해에 제나라의 세상도 끝날 것이라는 예언을 들으면서 2만5천의 사상자와 함께 후퇴해야만했다.

3.2. 위나라의 진격

수춘에서 제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위나라는 서하방면에서 진나라 군대와 연합해서 민지를 공격했다. 민지는 불리한 상황에서 크게 선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15] 또한 하동군을 움직여서 한나라를 공격하고자 했다.이를 초나라가 보복으로 진나라를 움직여서 제의 동맹이던 한나라를 공격한 것으로 오인[16]한 제나라는 동맹을 지키지 못 해서 리더십이 더 이상 하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위나라를 거쳐서 5만의 병력을 급파했다.

그리고 조선은 이때 수춘전투의 소식을 듣고 30만의 병력 중 20만을 제북 방면에, 10만을 동군 방면에 투입해 전쟁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위장이 이끌던 하남군은 위나라령 하남이나 대량에 피해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소황에서 대략 2배수인 제나라군을 공격했고, 중과부적으로 황지로 밀려나고 만다. 그런데 당시 도도를 대신해서 제나라군을 이끌던 제양방면군 사령관은 대략 2만 정도의 황지 주둔군을 무시하고 위나라의 수도인 대량을 공격했다(...).[17] 여기서 제군이 대량에서 손해만 입으면서 삽질하던 동안 조선 남부군 중 비비오가 이끌던 4만 2천명의 병력이 급습, 앞뒤로 포위당한 제군은 3만이 넘는 피해를 내면서 와해되었다.

3.2.1. 번외: 낙양전선

하동군을 이끌던 공손연은 맹진을 건너서 한나라를 공격해야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주나라의 영역을 지나가야만 했다.

사실 주나라는 이 때 완전히 몰락하여서 위의 요청을 거부하기 어려웠지만, 공손연이 위나라 내전 때 주나라를 협박했던 것이 문제가 되어 주나라 공공의 적으로 찍혀있던 상태였던 것이 문제가 되어서 길을 빌려주지 않아서 발발했다.

공손연으로써도 사실 낙양 함락까지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고 한군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로 낙양을 공격하였지만, 한군은 끝내 주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하동군은 경미한 피해를 입으면서 퇴각, 맹진항을 점거하고 낙양 인근 수로를 장악하는 선에서 만족해야만 했다.

4. 합종군의 진격

4.1. 북부군(제북 전선)

조옹이 이끌던 북부군 20만은 제수도하를 위해서 병력을 둘로 나누기로 한다. 조선상 조옹은 별동대 4만을 이끌고 패구로 가서 제군의 주목을 끌고, 준비과정에서 첩보 및 방첩을 담당해서 제수의 물길에 익숙했던 하관상경 하기는 16만의 병력을 이끌고 박릉을 거쳐서 평원으로 진격하기로 했다.

패구에서는 사전의 계획과는 다르게 뇌물을 먹인 관료가 제대로 힘을 못 썼지만, 조선군의 수가 너무 많아서 순식간에 돌파에 성공한다. 이 소식을 들은 고당의 책임자인 광장은 감무[18]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평원진을 주시하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조옹은 이목을 끌기 위해 대대적으로 배를 움직이는 등 탑수를 건너 수도 임치를 직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광장은 이것이 속임수임을 간파했지만 평원현령 등 아랫사람들의 성화[19]에 못 이겨서 평원에 약 7만의 병력 중 3만의 병력만을 두고 북상, 박릉에서 조선군과 일전을 벌였다.[20] 초반에는 제군이 선전했으나, 조선군의 장기인 기동전에서 밀려서 결국 제군은 대패, 광장은 1만 5천의 병력만을 이끌고 고당으로 퇴각해야만 했다.

이 때 하기가 이끌던 조선군의 본대는 박릉에서 신호를 받고 평원으로 도하했고, 이에 맞서서 평원을 지키던 3만의 제군은 5배가 넘는 조선군의 도하를 막무가내로 막아보려다 도하전에서 대패, 9할이 넘는 피해를 받으면서 와해되었다. 덕분에 조선군은 정보의 누출 없이 계속 진격하였다.

4.2. 남부군(동군전선)

고질이 이끌던 남부군은 계릉에서 복양까지 쾌진격해 원래 계획대로 작은 위를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21]

한편, 비비오가 이끌던 4만 2천의 병력은 대량을 구원한 뒤 제나라령 동군을 항복시키고, 늠구에서 고질이 이끌던 병력과 합류했고, 늠구는 10배가 넘는 군사를 보고 겁에 질려 항복했다.

하지만 예상 외로 복양의 국인들이 제나라를 배신하는 것을 거부, 폭동을 일으켜서 작은 위의 국군을 몰아내고, 범현에서 온 제군과 합류해 4만 7천의 군세를 만들었고, 제군을 이끌던 범현성주는 마릉[22] 으로 유인해서 조선군을 포위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23] 하지만, 우선도가 더 높던 제양방면 군이 전멸하고 급하게 끌어모은 군대답게 손발이 잘 맞지 않았던 제군은 복양 근처에서 조선군과 만났고, 질에서 압도당해 계략을 펼치기도 전에 와해되고 말았다.

이로써 제나라령 동군 방면은 완전히 제압되었다.

4.3. 삼천전선

민지의 함락과 위나라의 배신을 알아챈 한나라는 서부(삼천지방)의 최고 요지인 의양을 지키기 위해서 한거가 이끄는 중앙군을 파견해 대략 3만의 군세를 형성했다. 그 사이 위진연합군은 진군이 날로먹기 정신을 풀로 발휘해서 위군의 전투대비가 덜 되어있다는 명분으로 출전을 계속해서 미루고 있었다.[24]

그러다 결국 위군의 전투대비를 명분으로 미루는 것도 한계가 되어서 출진 준비를 할 때, 삼천의 모든 자원을 의양에 끌어모은 상태였던 한군이 먼저 한계에 도달해서 민지로 진격해와서 민지에서 야전을 벌이게 되었다. 초반은 나름대로 선전하던 한군이였지만, 수와 질에서 밀려서 점점 열세에 처해 후퇴했다. 그러던 도중 진군의 매복에 당해 총 절반의 사상자를 내었고 의양성이 함락되면서 진군은 자신들의 역할은 끝났다면서 회군했고, 민지전투로 상당히 소모된 서하군만으로는 더 이상의 진격이 불가능했기에 위나라의 행동은 종료.

이제 산동대전은 제와 조선의 결전만이 남게 되었다.

5. 제수대전

5.1. 조선군의 진군

평원을 점령하고 임치를 향해 진군하던 조선군은 탑수에 이르러서 중앙군의 일부를 지원받은[25] 광장이 군대를 결집할 시간을 벌기위해서 도하를 저지했고, 탑수도하전을 치르게 된다.

제군은 결국 조선군이 탑수를 건너는 것을 오래 막지는 못했지만, 중앙군이 결집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또한 천승이 자살돌격을 감행해서 조선군의 보급이 늦어졌기에 조선군은 광장을 추격할 수가 없었고, 광장은 제나라에서 끌어모은 중앙군과 합류하는데 성공한다.

이제 제수를 넘으면 이제 남은 것은 항전능력을 전부 광장에게 몰아준 상태인 임치를 비롯한 제나라의 내사지(內史地)[26]였다. 따라서 광장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제북을 내주었다는 오명을 피한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위해서든, 수도 임치의 안전을 위해서든 조선군을 여기서 저지해야만 했다. 또한 현실적으로 중원 최강의 기동력을 자랑하는 조선군을 상대로 강을 다시 건너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조선군은 최대목표 중 하나인 임치의 점령을 위해서, 그리고 더 이상 제남군이나 즉묵군 등의 아직 결집하지 못한 제군이 더 결집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제수에서 광장과 그가 이끄는 제군을 꺾어야만했다. 이렇게 양측의 의사가 맞아떨여져서 조선군 17만과 제군 15만 총 32만의 군대는 조선군은 탑수를, 제군은 제수를 등진 쌍배수진의 형태로 캐삭빵 제나라의 운명을 걸고 맞붙게 된다

5.2. 제수에서의 결전

초전에는 조선군이 1할이 넘는 큰 피해를 입히는등 우세를 점했다. 하지만 점차 광장이 이전에 조선군과 박릉에서 맞붙으며 느낀 전훈을 활용하면서 조선군의 장기인 기동력을 봉쇄하였다. 이후 조선군은 회심의 공격조차 익숙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오는 제군에게 변변한 피해를 주지 못한 채로 어느새 2할의 피해를 보는 등 크게 고전한다. [27] 결국 5차 회전을 넘기고 초장기전으로 넘어가 불리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제군과 조선군의 격돌이 일어나는가 했을 때...

동군을 제압하고 파견된 조선 기병대가 나타났다!

동군 일대가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까지만 알고 있던 광장은 동군의 병력이 이리 짧은 시간에 무력화돼서 조선군이 배후를 공격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반면, 조선군의 기동력은 상상 이상이었기에 완전히 배후가 비어있었다. 결국 초장기전으로 잔뜩 지친 시점에서 비비오가 이끌고 온 기병대 1만 2천이 제군의 허를 찌르며 대열이 붕괴, 제군은 5할의 사상자를 내며 와해된다.[28] 제군 총대장 광장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병력을 살리기 위해 최전방에 남아 있다가 전사한다.[29]

이렇게 제나라의 중앙군은 전멸했고, 수도인 임치는 항전능력을 상실했다.

5.3. 대전 이후의 대응

감무에 의해서 광장의 사망과 대패 소식을 들은 제나라 조정은 크게 두 주장으로 나뉘었다. 제왕 전벽강의 태자 시절 스승이었던 맹자는 전벽강이 여태껏 선정을 배풀었으니 임치의 국인들이 호응해 줄 것이고, 수도를 버리면 왕의 권위가 하락하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임치에 남아서 농성을 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 전직 대사마이자 군 원로인 전반은 이미 조선군의 기세를 막기 어려우며, 군왕이 함부로 그러한 위험을 무릅써서는 안된다며[30] 임치를 버리고 떠날 것을 주장했다. 전벽강은 임치를 떠나기로 결정했고, 임치 인구의 7분의 1만이 임치에 남고 나머지는 전벽강을 따라서 즉묵으로 떠났다. [31]

임치 국인들이 댐을 터뜨리거나, 직하 학사들이 강의를 하려는 등의 사보타주에도 불구하고 무식한 조선군은 전벽강을 거의 잡을 뻔 했지만 때마침 교동군이 합류해서 전벽강은 무사히 즉묵으로 도주하는데 성공한다.

6. 종전으로 가는길

6.1. 순우 전투

조선군이 마지막 목표인 즉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순우를 점령해야만 했고, 제군으로써는 즉묵의 안전을 위해서는 순우를 지켜내야만 했다. 중간에 전거가 이끄는 제남군이 난입해서 잠깐 위기 상황이 나오기도 했지만 조선군은 미미한 피해로 대처하고, 이후 조선 남부군의 지원병력이 합류하여 교동군과 제남군은 각자 도주를 시도, 제남군만이 전거의 마지막 투혼으로 어떻게든 빠져 나가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예상 외로 피해가 누적되었고 보급로가 길어지며 보급에 난항을 겪기 시작했기에 조선군은 순우를 점령한 후 멈춰선다.

이것으로 산동대전의 전투는 끝을 맞이하였다.

6.2. 조선의 종전안 마련

승전 소식을 들은 조선왕 기유는 종전협의 초안을 준비한다.[32] 신료들의 검토 결과 초안의 모순되는 부분이나 무의미한 부분 곳곳이 첨삭되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임치의 반환이 가능하다고 한 부분이었는데, 이는 중원 전체에서도 그 크기로 손꼽히는 최대급 도시이자 거점을 도로 내주는 악수였다. 조선이 영유하게 될 임치군의 잔여 거점 전체가 각개격파에 노출되는, 제나라에게 임치군전체를 거저 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 안을 제공한 참치들의 희생양인 어사대부 기지를 문책하는 과정에서 기지가 제나라에게서 뒷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기지를 반역죄로 처형하고 종전안을 수정한다. 그 이후 정정된 안은 다음과 같다.

1) 작은 위(衛) - 독립보장 후 조선의 영향권으로 삼을 수 있게 작업, 작위는 위군(君).
2) 송 - 칭왕. 하비 반환은 불가능. 상구 반환을 명목으로 지지를 요구.
3) 제 - 현재 조선, 위의 점령지 인정. 상구 할양, 지금까지의 부당한 전쟁 유발을 위한 간섭, 도발과 침략행위에 대해 송과 초에 제왕이 사죄할 것. 조선, 위, 초 삼국에 배상금 지불할 것.
4) 위(魏) - 하남의 주도권을 위에 보장. 초를 견제하기 위해 대진정책에 공조를 요청.
5) 진 - 조선-위 동맹에 끌어들일 방안 모색
6) 한 - 무대응
7) 초 - 지금까지의 제의 부당한 반초행동에 대한 제왕의 사죄, 인질, 배상금을 제공. 그 외엔 위(魏)가 동의하는 내에서 초의 요구 수용 태도.

태도
1) 제나라는 중원열국의 모든 분쟁에 편파적인 개입, 간섭, 공작을 통해 열국의 불만을 초래했다
2) 따라서 조선은 중원열국간의 분쟁에 대한 지나친 간섭을 배제하고 해당 국가의 의사를 존중하겠다
3) 또한 조선은 동맹국인 위, 초와 협조하여 이를 지킬것이다

7. 한단 회담

한단에서 승전국인 조선,위,진,초가 모여서 종전안에 대한 협상을 개시했다. 이 때 위나라가 작은 위의 칭왕이나 상구의 할양 등 의견들이 제시하였지만, 결국 종전안에 더해서 초와 송이 화의를 맺고, 상구를 초나라에게 할양하는 것으로 무난하게 공식적인 합의를 보았다.[33]

하지만 이어지는 개별 국가들 사이에서의 회담으로 통수가 난무하게 된다. 조선은 관중에서 초나라를 몰아내기 위해서 위에 접촉했었다. 하지만 이 때 연속 펌블이 떠서 소진에게 잘 못 대응해서 위기감을 느끼게 만든 점이 말썽이었다. 그 결과 위나라는 조선이 너무 커진데다 자신들 또한 배신할 수 있다고 여겨 먼저 조선을 배신할 것을 결의, 진-초-위-제가 가로로 힘을 합쳐서 조선의 위협에 맞서자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합횡 계획의 시작이었다.

이후 초나라와의 협정에서 계속 펌블 내는 웅괴에게 곶통 받긴했지만 위나라의 태자를 전쟁 개시시에 초나라에 인질로 보내겠다고하는 조건으로 초나라와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또한 음진에서 약양까지의 지역을 바칠테니 초를 몰아내는 것을 도와달라고 딜을 건[34] 진나라에게 경취를 불러와서 초와의 동맹 사실을 밝히고, 반협박으로 전쟁 이후 무관을 돌려줄 것이라고 말하며 회유했다.[35]결국 진나라는 위나라의 요구에 굴복하고 합횡군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선 측은 초를 관중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당사자인 진과 접촉하고자 했지만, 합횡에 참여한 진은 당연히 만나주지 않았고, 그대로 한단회담은 새로운 위기를 암시하면서 종료되었다.

하지만 이후 제나라에게 종전안을 강요했을 때 승전국들에겐 예상 외의 사태가 발생한다. 제나라는 송이 초나 위, 특히 초에 대한 신뢰도가 극도로 낮은 반면, 상구가 초나라에게 넘어가면 송의 수도 팽성이 위험해진다는 점과, 맹상군이 이전에 송나라에 베풀어둔 은혜를 이용해서 송과의 동맹을 그대로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이를 이용해서 조선과의 협상에서 왕의 동생인 전교사를 초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초나라 대신 위나라에게 사과하고[36], 상구는 그대로 제나라가 영유하기로 협상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초나라는 졸지에 이익을 거의 얻지 못하게 되어서 조선과 송에 상당한 불만을 품게 된다.

8. 결과

파일:96BAEA1C-2D00-42AA-AA38-D971BC2C0856.jpg [37]

제나라의 몰락. 합횡 국면의 시작.

제나라는 막대한 영토를 빼앗긴 것에 더하여 멀쩡하게 남은 군대가 제남군 정도 뿐일 정도로 완전히 몰락하였다.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순우 전투로 인해 반항적이던 즉묵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왕의 권위가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정도였다.

반대로 조선은 명실상부한 중원의 최강자가 된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도 이미 홀로 30만 대군을 동원할 수준이었는데 추가로 제나라의 40~50%, 그것도 노른자위 부분을 집어삼키기까지 한 조선의 덩치는 이제 존재 자체로 타국에 위협이 될 정도였고, 특히 반토막난 제나라와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38]

한편 막대한 전력이 투입된 이 전쟁으로 승패 상관없이 모든 나라가 전후 재정적으로 고통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전쟁 양상도 오랜 시간 동안 힘을 모아서 단숨에 적을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안에 여러번 싸우면서 조금씩 침식하고 협상하는 형태가 되었다.

외교적 측면에서는 합횡군을 모으고 참여국의 신뢰를 모으기 위해 발품을 도는 위나라와, 군사 동원을 자제하는 동시에 외교적 고립을 회피, 재정 회복을 위한 내정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려는 조선 측의 외교적 대전략이 엇갈리는, 소위 '합횡 국면'이 시작되었다.[39]

그리고 이런 상황은 진나라를 조선 측에 합류시키기 위한 진왕위계승전에 조선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40]
[1] 조선 편으로 참전하고자 하였으나 국인폭동[41] 끝에 제 편으로 참전하게 된다. 자세한 상세는 아래 내용을 참고.[2] 딱히 제나라 편은 아니었으나 위나라 하동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 이유는 아래 내용을 참고[3] 제의 수춘 공격에 군량 수송 지원 정도로만 참여했다.[4] 합종군 측에 가담하려던 국군을 몰아낸 뒤, 제군에 가담하였다.[5] 작중에서는 주나라 태사(太師) 관직의 AA를 사용했지만 실제 태사가 지휘했는지 여부는 불명.[6] 군사로는 조선이, 경제력으로는 제나라가 한 끝 앞서던 시점이였다.[7] 이 3개 군은 제북 지방이라고도 불리는, 제나라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방이고, 수도를 포함한 제나라의 초기 영토이기도 하다.[8] 초나라에서 재상으로 임명한 두혁을 해임시키는데는 성공했다.[9] 원역사에서도 춘추시대부터 패자의 역할중 하나는 초의 확장을 막는 것이었고, 작중의 제위왕 전인제가 패자였던 때도 이는 마찬가지였다.[10] 그 전에 위나라는 위앵 재위 말, 왕위계승 문제로 내전이 발발했는데, 조선은 이러한 경우 항상 원래 결정된 계승자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개입했고, 이는 후일 위신이 급사한 것까지 더해 보험 성격으로 본인이 부재할 경우 그 자식인 위래에게 승계가 내정되어 사실상 정통 승계자에게 나쁜 인상이 심어질 요인은 제거되고 좋은 인상을 남기게 되는 효과를 부른 것이 컸다.[11] 원래는 대조선 강경파던 전반조차도 조선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12] 다만 제나라 본토의 힘이 많이 소모된 것은 아니었다.[13] 전영은 자신이 세운 수춘 공격 계획을 광장이 거부하자 고당으로의 보급에 장난질을 쳐서 보복하였다.[14] 사실 초나라는 이 때 제나라에 선제공격을 하기로 돼있었기에 이 공격은 결과적으로는 초나라에 이익이 되었다(...)[15] 그런데 이건 억지로 끌려나온 진군이 위나라군만 피해를 보도록 군사를 운용한 탓도 있었다(...)[16] 위진연합군이 민지를 공격한 상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이후에는 민지에서 큰 피해를 입은 위군 대신 진군이 움직임을 주도하면서 오인이 장기화되었다.[17] 이게 왜 바보짓이였냐면 대량은 수도답게 방비가 잘 돼있었고, 조선군의 존재를 제외해도 위장이 이끄는 위군은 건재한 상황이였기 때문. 앞뒤로 쌈싸먹히기 딱 좋은 포진이였다(...)[18] 공손석을 따라 한에서 제로 넘어온 뒤, 혜시의 추천을 받아 광장의 막료로 갓 임관한 시점이었다.[19] 만에 하나 조선군이 수도를 직공하는데 성공하면 방관만 하였다고 반역죄로 몰릴 수도 있었고, 직전에 왕제(王弟)인 정곽군 전영과의 불화로 군량보급에 장난질을 당했던 게 주변인들의 이런 불안감을 더 부추겼다.[20] 이 때 박릉의 병력은 광장이 늦은 걸 보고 이미 대세가 기운 게 아닌가 의심하며 전장에 참여하지 않는 추태를 보였다(...)[21] 원래라면 경전차도 지나가기 어려운 지역이라 강을 건너서 진격해야만 했지만, 조선군은 이미 세후 때 전차병을 거의 폐지해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22] 원역사에서는 손빈이 방연을 유인해서 죽인 그 마릉이다.[23] 마침 조선군은 비비오가 2만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북부군을 도우러 가고 있었고, 점령지 치안 유지등으로 병력이 분산되어서 5만 7천으로 크게 병력이 줄어든 상태였다.[24] 위군이 민지전투 피해의 대부분을 받아 진군이 대다수여서 가능한 일이였다[25] 원래 지원군 사령관은 원역사에서 무능하다고 까인 신비였지만, 조선군의 규모를 듣고 군사를 광장에게 넘기고 임치로 도망쳤다.(...)[26] 요즘 말로 하자면 수도권[27] 이때 조선군은 3만 4천의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여태껏 합종군 전체가 입은 피해보다 큰 것이였다.[28] 당시 이 전개는 워털루 전투의 블뤼허나 귀주 대첩의 강민첨 등 실제 전투의 예시와 상당부분 비교되었다.[29] 이후 광장의 시체는 조옹이 수습해 보검과 함께 묻어준다.[30] 안시성 전투에서 싸움이 길어지자 안시성을 방치하고 오골성을 직공하려던 당태종 이세민을 '제왕의 싸움은 보통 장수의 원정과 다르다. 모험을 하며 요행을 바라선 안된다'면서 말리던 장손무기와 비슷한 논거라 할 수 있다.[31] 이때 태자 전지와 공주 전교사는 조선군이 즉묵을 침공하는 것을 걱정해서 거로 보냈다.[32] 메타적으로는 참가자들이 의견을 모아 다같이 직접 작성하였다.[33] 상구는 위치상 위나라와 초나라가 이어지게 만들어서 조선이 음진에서 초,위와 합종군을 만들었듯이 위나라와 초나라가 작당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는 의미도 있었다.[34] 이 때 음진은 조선의 영역이였지만, 영사는 이미 위나라가 조선을 배신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35] 다만 초는 이때 위수 이남지역을 사실상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었고, 여력을 관중에 집중한 것을 보면 무관을 돌려줄 생각 따위는 없었던 듯하다.[36] 대량 공격에 대한 사과였다. 실제로는 도하하던 제군을 위군이 먼저 통수쳤지만, 합종군은 이렇게 '제군이 먼저 갑작스레 위군과 싸우고 대량까지 공격했다'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나마) 전쟁의 정당성을 조작할 수 있었다.[37] 연보라색으로 색칠된 부분이 제나라가 산동대전으로 상실한 영토이다.[38] 여담으로 작은 위의 국군인 위군은 같은 군이더라도 조선의 신료인 군들보다는 높은 대우를 받게 되고, 궤진 소유권의 5할을 받기도 했다.[39] 메타적으로는 이 때 이후로 상황상 중대한 외교적 결정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적극적인 외교의 필요성이 증가하면서 외교 선택지의 비중이 상승하기 시작했다.[40] 메타적으로는 위와 초의 연계를 끊고자 하는 참가자(연재처 호칭 '참치')들의 의도였다. 다만 작중에선 위-초 동맹의 가능성을 조선이 인식한 것은 훨씬 나중이었다. 따라서 작중 조선에서는 진이 초에 종속된 상태를 타파하고, 초의 시선을 관중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개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