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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4차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 ||
한문 | 邵力子 | |
한국식 독음 | 소력자 | |
영문 | Shao Lizi | |
본명 | 소경태(邵景泰) | |
자 | 중휘(仲輝) | |
호 | 봉수(鳳壽) | |
출생 | 1882년 12월 7일 청나라 저장성 소흥현 | |
사망 | 1967년 12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 |
국적 |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 중화인민공화국 | |
학력 | 상하이 진단학원 졸업 | |
직업 | 정치가 | |
종교 | 무신론 |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일찍이 중국 동맹회에 가담해 중국에 공화정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고 1919년 중국 국민당에 가입했으며 1920년 상하이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민국일보> 총편집인을 맡았다. 1925년 황푸군관학교의 사무처장을 맡고 1926년 중국 공산당을 탈퇴했다. 이후 간쑤성 주석, 산시성 주석, 국민당 선전부장, 소련 주재 대사 등을 역임했으며 국공합작을 주장했다. 1949년 평화협상을 위해 국민정부 대표단과 함께 베이징에 갔다가 협상 결렬 후 베이징에 남았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국민당 혁명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시기 박해당했다.2. 생애
2.1. 초기 경력
사오리쯔는 1882년 12월 7일 저장성 소흥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20세 때인 1902년 향시에 합격했고 1905년 상하이에서 진단공학에서 공부한 후 1906년 10월 일본에 유학가서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다. 1907년 봄 중국으로귀국한 그는 위유런(于右任) 등과 함께 <신주일보>를 창간하여 반청사상을 선전했다. 1909년 5월, 그는 상하이에 <민호일보>를 창간해 혁명사상을 선전했다가 3개월 후 당국에 의해 폐쇄당했다. 10월에는 <민하일보>를 창간해 혁명 선전을 계속했으나 42일 만에 가얍류되었다. 그해 11월 이후에는 산시성 고등학당에서 교수로 일했지만 공화주의를 전파하다가 당국에 의해 추방되었다.1910년 여름, 사오리쯔는 상하이로 돌아가 위유런 등과 함께 <민립보>를 창간하고 국민독립정신을 배양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던 중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사오리쯔는 민립보를 통해 혁명군에게 북벌을 감행해 베이징을 공략할 것을 호소했다. 민립보는 당시 동맹회의 중요한 지휘소가 되어 혁명당인들의 연락기관이 되었다. 1913년 <민립보>가 위안스카이 정권에 의해 폐간된 후, 그는 복단공학에서 국문 교원을 역임했고, 후에는 사립 복단대학의 중국 문학과 주임을 역임했다. 1914년, 그는 혁명문학단체인 <남사(南社)>를 설립했고 그해 7월에 중화혁명당에 입당했다.
1916년 1월, 사오리쯔는 예추룬(叶楚伦)과 함께 상하이에서 <민국일보>를 창간해 사장을 맡았다. 이후 민국일보는 러시아 혁명과 5.4 운동에 지지를 표명했고 신사상, 신문화를 적극적으로 선전했다. 또한 1919년 10월엔 중국 국민당에 가입했고 1920년 5월 천두슈 등과 함께 마르크스 연구회를 창립했고 그해 8월엔 상하이 공산당 발기인 중 한 명이 되었다. 1922년 10월 위유런 등과 함께 상하이대학을 창립해 부총장 및 교장 대리를 맡았으며 1924년 1월 국민당 제1기 중앙후보 집행위원에 당선되었으며 2월에 국민당 상하이 집행부 공농부 비서를 맡아 장강 일대의 각 성 당무를 이끌며 삼민주의를 선전하고 소련과의 연계, 공산당과의 동맹, 농공인 지원 등 3대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2.2. 중화민국 시기
1925년 여름, 사오리쯔는 5.30 운동에 가담했다가 상하이 당국에게 지명수배되어 상하이를 떠나 광저우로 향했다. 또한 그는 1925년 5월부터 황푸군관학교의 비서장, 정치부주임을 역임했으며 공산당에서도 조직 활동에 참여했다. 1926년 1월, 국민당 제2기 중앙감위를 맡은 그해 7워에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사무총장을 맡아 국공 양당이 협력하는 북벌을 위해 정치조직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러다가 1926년 8월, 그가 계속 국민당과 공산당원을 겸임하면 사람들의 의심을 살 테니 차라리 국민당원으로 남아서 국민당 내 혁명 사업을 추진하라는 천두슈, 취추바이의 건의에 따라 공산당을 탈퇴했다.1926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7차 위원회 확대회의에 국민당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고, 모스크바 손중산 대학에 입학해 공부하고 국민당 중산대학 대표로서 학교 이사회의 성원을 역임했다. 1927년 5월에 중국으로 귀국한 그는 1928년 2월부터 국민당 당중앙정치회의위원, 중국공학교장 겸 푸단중학교 주임, 육해공군 총사령부 사무총장, 국민당 3기 중앙감위, 간쑤성 정부 주석, 산시성 정부 주석 등을 역임했다. 이 시기 그는 국민정부에게 초공작전을 중단하고 국공합작을 재결성할 것을 호소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했을 때, 장제스는 무력으로 맞서기보다는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자 전국에서 국민달의 반일감정이 폭발해 항일 시위가 각지에서 벌어졌다. 사오리쯔는 국민정부에게 공산당 토벌을 중지하고 항일 투쟁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 1935년 봄, 산시성 정부 주석을 맡은 사오리쯔는 양후청과 함께 군정을 실시하여 농림 수리사업을 발전시키고 황무지를 개간했으며 교통 및 문화 사업을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또한 그는 장쉐량과 양후청의 항일 주장에 동조하며 장제스의 공산당 토벌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
1936년 12월 서안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오리쯔는 시안에 있는다른 국민당 군정요원과 함께 장쉐량의 봉천군에게 구금되었다. 다음날 사오리쯔는 기회를 엿보다가 장제스에게 "이미 일이 벌어진 이상, 위원장께서는 국가와 인민을 중시해야 합니다. 그들(장쉐량과 양후청)의 요구를 고려해보십시오."라고 말했다. 이후 서안사건이 평화적으로 해결된 뒤, 사오리쯔는 가택 연금된 장쉐량의 독서를 도운다는 명목으로 주기적으로 방문해 공산당과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것이 나중에 문제로 불거졌고, 결국 그는 산시성 정부 주석직에서 해임되었다.
2.3.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 시기
루거우차오 사건 다음날, 중국 공산당은 전 국미에게 항일 단결을 호소했고 국민정부에게 국공 양당이 협력하는 3가지 기본 정치 강령을 제시해 국공합작과 대외협력을 주장했다. 이에 사오리쯔는 국민당 대표로 루산회의에 참여해 국공 얀당의 항일 투쟁을 협의했다. 1983년, 사오리쯔는 '국민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라'라는 제목의 사설을 발표해 중국의 완전한 승리를 위해 끝까지 항전하여 굴복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한커우에서 국제 반침략 중국분회 창립 총회를 거행하여 이사회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회의에서 평화운동이라는 명칭을 반침략운동으로 바꾸되, 전 세계에 중국의 항전의 결심과 자신감을 확고히 표명할 것을 호소했다. 또한 사오리쯔는 줄곧 중소우호를 주장했고 일본과의 전쟁을 효과적으로 치르려면 소련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강조했다.1940년대 초, 그는 중소국교를 강화하고 항일전쟁에 대해 소련의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소련으로 향했다. 그는 주소련 중국대사를 역임하면서 소련이 중국에 무기와 물자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도록 유도했다. 독소전쟁 발발 후, 사오리쯔는 "중소국교를 부단히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보고서 작성, 연설 등 여러 방식을 통해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각 방면에 소련의 상황을 소개하고 중소 문화교류를 촉진해 소련에 대한 중국 인민의 이해를 제고하고 외교역량을 강화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이후 중국으로 돌아와 국민참정회의 사무총장으로 재직할 때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쟁에 대한 정치적 해법을 주장하며, 양당이 계속 협력하여 항일 투쟁을 함께하기를 촉구했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 중국 전역에서 평화를 호소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의 공산당 대표는 1945년 8월부터 9월까지 충칭에서 장제스를 비롯한 국민당 대표들과 평화협상을 벌였다. 사오리쯔는 국민당 대표중 한명으로 평화회담에 참여했고 쌍십협정 체결에 주력했다. 1946년 초 정치협상회의 제5차 회의에 참석한 그는 쑨원의 공훈을 대대적으로 찬양하고 중국 공산당의 북벌 참여, 중일전쟁에서의 역할을 톺이 평가하며 국공합작의 지속을 희망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공산당을 배제한 채 정치협상회의를 주관하자, 그는 크게 실망해 대회 사무총장직을 거부했다.
1948년 말, 장제스는 국공내전이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고려해 1949년 설날에 '구화성명(求和声明)'을 발표하고 1월 21일에 하야했다. 다음날 리쭝런이 총통 권한대행에 취임했고 사오리쯔, 장즈중 등 5명이 대표자로 나서 중국 공산당과의 평화협상을 준비했다. 사오리쯔는 공식 협상에 앞서 '상하이 인민평화대표단'을 조직하고 장스자오(章士钊) 등 3인의 대표단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가서 주요 공산당원과 사적으로 만나 평화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2월 14일 베이징에 도착한 사오리쯔는 2월 20일 공산당과의 회의에서 "인민들은 평화를 간절히 바라고, 또한 베이징에서의 평화를 원하며, 천진에서의 평화는 원하지 않는다."고 연설했다. 이후 중국 공산당의 양해를 얻은 그는 정식 담판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3월 중순, 난징 정부는 평화협상 대표단을 구성했다. 본래 사오리쯔가 수석대표를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계속 고사하자 장즈중이 수석대표가 되기로했다. 대표단은 베이징으로 가서 공산당과 협상했다. 그러나 공산당 측이 "장제스를 전범으로 넘겨라."고 요구하자 국민당은 거부했고, 결국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많은 대표단이 베이징을 떠났지만, 사오리쯔는 장즈중 등과 함께 베이징에 남기로 결정했다.
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화인민공화국 출범후, 사오리쯔는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회의 개막식에서 "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과 정치협상회의를 위한 모든 결의를 실현하기 위해 지성껏 노력하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그는 제1회 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에 선출되었고 뒤이어 중앙인민정부 정무원 정무위원, 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2~4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또한 1949년 11월 이후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제 2~4기 중앙 상무위원에 당선되었다.1954년 무렵, 사오리즈는 출산을 제한하자고 주장한 마인추의 의견에 동의했다. 사실 사오리쯔는 1920년대에 중국이 인구통제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1921년 민국일보 편집국장을 지낼 때 적극적으로 산아제한을 주장했으며 10월 혁명 후 러시아 혼인율과 산아제한을 근거로 들었다. 또한 그는 1922년 5월 '여성평론'에 산아제한 기술 강화를 위한 연구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공산정권에 참여한 후에는 인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마오쩌둥의 의사에 부합해 출산 장려 정책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마인추가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설파하자, 그는 여기에 공감하여 30여년 만에 산아제한정책 추진을 주장했다. 1954년 9월 17일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첫 회의에서, 그는 "사람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경제가 아직 발전하지 못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인구를 통제해야 한다. 인구를 통제하지 않으면 후환이 무궁하니, 피임에 관한 의학 이론을 대대적으로 전파하고, 피임과 관련된 약물을 지도하고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해 12월 19일, 그는 <광명일보>에 '피임 상식 전파에 관한 문제'라는 장문의 글을 게재했다.
사오리쯔가 이렇듯 출산제한 정책 추진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그의 개인사와도 연관이 있었다. 그는 아내와 결혼한 후 아이를 여섯 낳았다. 이때 아내는 여섯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며 사오리쯔에게 낙태시켜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사오리쯔가 여러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감히 이런 수술을 하려는 의사는 없었다. 결국 아내는 여섯번째 아이를 낳은 뒤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이 일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줬고 산아제한과 피임 및 낙태 기술 개발의 필요성을 인식시켰다.
그러나 1957년 반우파 투쟁 이후, 출산제한정책을 촉구하던 마인추가 대우파로 몰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사오리쯔는 마오쩌둥에게 출산제한의 필요성을 호소했지만 마오쩌둥은 듣지 않았다. 이후 그는 캉성의 지휘하에 마인추 타도 열풍이 들끓는 상황에 기가 질렸는지 침묵을 지켰다.
문화대혁명 시기, 그는 지난날 공산당을 탈퇴하고 국민당에 협력한 일과 마인추의 주장을 옹호한 일 때문에 홍위병에 끌려가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의 조치로 특별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1967년 12월 25일 베이징에서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