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本因坊일본의 바둑 가문. 현대에는 일본의 프로 바둑 기전으로 변모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일본어 발음으로는 '혼인보' / 한자 독음을 한국식으로 읽으면 '본인방'인데 한국에서는 둘 다 혼용해서 사용하는 편이다.
2. 세습 바둑가문 혼인보
전근대 일본의 4대 바둑 가문[1] 중 하나. 시조는 센고쿠 시대 말의 승려이자 바둑 명인이었던 닛카이(日海)인데, '혼인보'는 그가 수행하던 잣코지(寂光寺)라는 절의 암자(庵子) 이름이다. 바둑을 좋아했던 오다 노부나가가 그의 명성을 듣고 초빙하여 5점 접바둑을 뒀는데 이기지 못하자 "과연 그대가 명인"이라고 한 것이 바둑계에서 명인이라는 칭호를 쓰게 된 시초라고 한다.[2]그는 1582년 6월 21일에 있었던 바둑에서 무승부가 나오는 진기한 기록을 세웠으나 하필 이 대국 종료 후 일본 역사에 획을 그은 혼노지의 변 사건이 터져버렸다.
혼인보 산사의 영정. |
노부나가의 사후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바둑 스승을 한 닛카이는, 1603년 막부가 있는 에도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혼인보 가문을 개창하고 혼인보 산사([ruby(本因坊 算砂, ruby=ほんいんぼう さんさ)])가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바둑계의 최고수 닛카이에게 녹봉을 지급했다. 이는 후에 공식적인 관직 '고도코로'의 시작이다. 최초의 명인인 산사는 1623년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명인으로 인정받은, 혹은 임명받거나 쟁취한 기사는 막부에서 내린 관직인 기소(碁所,고도코로)에 취임할 수 있었다. 고도코로는 많은 녹봉을 받았으며, 기사의 단위(段位) 결정, 면장 발급, 중요 대국의 기획 등 바둑계의 크고 작은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고도코로에 임명되기 위해 혼인보(本因坊), 이노우에(井上), 야스이(安井), 하야시(林) 네 가문이 300여 년간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것이 그대로 일본 바둑의 역사가 되었다.
초대 혼인보인 산사가 세운 전통은 가문의 마지막까지 계속 이어져서, 가문의 당주는 혈연이 아닌 가장 뛰어난 실력자에게 계승되었다. 후계자로 지명된 사람은 아토메(跡目)로 불렸는데, 아토메로 지명된 사람 중 일찍 죽는 등의 이유로 실제 혼인보를 계승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 유명한 혼인보 슈사쿠. 1862년 슈사쿠가 죽고 곧이어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의 지원이 끊어지자, 가문 자체가 궁핍해져 후계자를 찾기 어려워졌다. 14세 혼인보 슈와가 1873년 죽자 장남 슈에츠가 15세로 가문을 이어 처음으로 혈연으로 혼인보가 이어졌지만, 가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상을 일으켜, 슈와의 3남 슈겐이 16세로 가문을 이었으나 이도 그릇이 아니라, 다른 가문의 양자로 갔던 차남 슈에이가 17세 혼인보가 된다. 이후 1886년 잠시 무라세 슈호가 18세 혼인보가 되지만[3] 그가 죽자 다시 슈에이가 이를 이었고, 1907년 죽자 슈겐이 다시 잇는 등 혼란이 쭈욱 이어졌다.
마지막 당주는 21세 혼인보 슈사이(本因坊 秀哉, 1874-1940)이다.[4] 그는 1914년 명인의 칭호를 얻었는데, 1924년에 오쿠라 재벌 2대 총수 오쿠라 기시치로의 후원 하에 일본 기사들이 일본기원을 설립할 때 동참하기도 했다. 그 후 1936년 슈사이는 혼인보 가문의 가명(家名)을 일본기원에 양도했고, 일본기원은 1939년에 혼인보 가문의 가명(家名)을 계승하는 기사를 선수권제로 결정하기 위한 타이틀전인 혼인보전을 출범시켰다.
2.1. 역대 세습 혼인보
세 | 기사 | 단위 | 명인 | 기소 |
1세 | 혼인보 산사(本因坊算砂) | 1대 명인 | ||
2세 | 혼인보 산에츠(本因坊算悦) | 七단 | ||
3세 | 혼인보 도에츠(本因坊道悦) | 八단 | ||
4세 | 혼인보 도사쿠(本因坊道策) | 4대 명인 | 2대 기소 | |
5세 | 혼인보 도치(本因坊道知) | 6대 명인 | 4대 기소 | |
6세 | 혼인보 치하쿠(本因坊知伯) | 六단 | ||
7세 | 혼인보 슈하쿠(本因坊秀伯) | 六단 | ||
8세 | 혼인보 하쿠겐(本因坊伯元) | 六단 | ||
9세 | 혼인보 사츠겐(本因坊察元) | 7대 명인 | 5대 기소 | |
10세 | 혼인보 레츠겐(本因坊烈元) | 八단 | ||
11세 | 혼인보 겐조(本因坊元丈) | 八단 | ||
12세 | 혼인보 조와(本因坊丈和) | 8대 명인 | 6대 기소 | |
13세 | 혼인보 조사쿠(本因坊丈策) | 七단 | ||
14세 | 혼인보 슈와(本因坊秀和) | 八단 | ||
15세 | 혼인보 슈에츠(本因坊秀悦) | 六단 | ||
16세 | 혼인보 슈겐(本因坊秀元) | 六단 | ||
17세 | 혼인보 슈에이(本因坊秀栄) | 9대 명인[5] | ||
18세 | 혼인보 슈호(本因坊秀甫) | 八단 | ||
19세 | 혼인보 슈에이(本因坊秀栄) | |||
20세 | 혼인보 슈겐(本因坊秀元) | |||
21세 | 혼인보 슈사이(本因坊秀哉) | 10대 명인 |
- 명인의 단위는 모두 九단.
- 19세 슈에이, 20세 슈겐은 재임.
- 2대 명인은 나카무라 도세키(中村道碩), 3대 명인이자 초대 기소는 야스이(安井)가(家) 2세 야스이 산치(安井算知) 그리고 5대 명인이자 3대 기소는 이노우에(井上)가(家) 4세 이노우에 도세츠 인세키(井上道節因碩).
3. 프로 바둑 대회 혼인보전
- 혼인보전 문서 참고.
3.1. 영세 칭호
- 혼인보전에서 5연패 혹은 통산 10회 이상 우승한 기사에게는 60세 이상 혹은 은퇴 후에 ○○세 혼인보(○○世本因坊)라는 영세 칭호를 쓸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대 | 칭호 | 본명 | 연승경력 | 기타 |
22세 | 슈가쿠(秀格) | 다카가와 가쿠 | 1952~1960(9연패) | |
23세 | 에이쥬(栄寿) | 사카타 에이오 | 1961~1967(7연패) | |
24세 | 슈호(秀芳) | 이시다 요시오 | 1971~1975(5연패) | |
25세 | 치쿤(治勲) | 조치훈 | 1989~1998(10연패) | 예외적으로 본명 사용, 81,82년 우승 포함 총 12회 우승[6] |
26세 | 몬유(文裕) | 이야마 유타 | 2012~2022(11연패) | 文은 문수보살(文殊菩薩), 裕는 이름 유타(裕太)에서 따왔다. |
4. 여담
- 센고쿠 시대를 다룬 게임 태합입지전5에 혼인보 산사가 등장한다. 다른 능력치는 바닥인데 바둑 명인인 것을 반영한 듯한 지모80과 군학3, 산술4, 예법3의 능력치가 인상적. 변설도 1이라도 있기 때문에 산술4와 맞물려 군자금 셔틀로 유용하다. 군학이 3이지만 통솔이 또 16으로 바닥이기 때문에 전장에 내보내는 건 조금 무리가 따른다.
- 일본의 바둑 만화 히카루의 바둑에는 작중 주요 캐릭터 중 한 명인 후지와라노 사이가 혼인보 슈사쿠의 몸에 깃들어 대리 바둑을 뒀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또한 작중에 등장하는 혼인보 타이틀 홀더 '쿠와바라'는 슈사쿠의 어릴 적 이름인 '쿠와바라 토라지로'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여진다.
- 혼인보(본인방)의 이름을 따온 풍아대국 본인방이라는 PC 기반 바둑 게임이 있다. 일본에서 1996년에 발매, 우리나라에는 2000년경에 한글화되어 발매되었다.
- 도쿄 스가모역 근처의 혼묘지라는 절에 혼인보 가문의 묘소가 있다. 히카루의 바둑에서 히카루가 이곳을 방문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 일본 바둑계의 전설 중 한 명인 후지사와 히데유키 명예기성(名誉棋聖)[7]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제자와 후배들이 秀行을 다른식으로 읽어 슈코 선생으로 부르곤 했는데, '슈(秀)'는 혼인보가 쓰는 호칭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여지가 있었다. 다만 실제로 문제가 된 적은 없으며, 언론 등에서도 본명보다는 슈코 선생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1] 혼인보(本因坊), 하야시(林), 야스이(安井), 이노우에(井上)[2] 참고로 닛카이는 노부나가보다 훨씬 어리다. 1559년생으로 노부나가를 처음 만났을 때는 10대였고, 1582년 혼노지의 변 때는 20대였다.[3] 그가 혼인보가 되는 과정은 너무 길어서 항목이 따로 필요하다.[4] 그가 혼인보 가문에 들어가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슈에이와 절친했던 김옥균이다. 슈에이는 김옥균이 오가사와라 제도에 유배되었을 때 배를 타고 직접 찾아가기도 했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5] 죽기 1년 전인 1906년에 명인으로 추대됐는데, 당시에는 일본 정부가 고도코로를 폐지한데다, 달리 명인으로 추대해줄 단체도 없었기 때문에 바둑 기사들이 자기들끼리 추대한 것이다.[6] 조치훈 외에 혼인보전에서 우승한 한국계 기사로는 1999년 조치훈의 11연패를 저지하며 우승한 조선진 九단이 있다.[7] 조훈현 九단의 실질적인 바둑 스승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