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벵가리 Bengar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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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불명 |
사망 | 1974년 11월 28일 |
대한민국 창경원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
성별 | 수컷 |
종 | 시베리아호랑이[1] |
1. 개요
창경원에서 사육했던 시베리아호랑이. 대한민국의 역대 호랑이 중 가장 크기로 유명하지만, 혈통 불분명의 이유로 국제 호랑이 혈통서(International tiger studbook)엔 실리지 못했다.2. 일생
벵가리의 출생 위치, 정확한 나이 등의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2.1. 어떻게 창경원으로 왔나?
1963년 경, 당시 창경원은 숫처녀 상태로 늙어가던 창경원의 두 암컷 남방계 호랑이[2] '금강'과 '백두'의 짝으로 삼을 수호랑이를 몰색하던 중이였다. 허나 수호랑이를 구하자 하니 국내의 호랑이는 진작 씨가 말라버렸고, 그렇다고 외국에서 수입을 하자니 외화 사정이 딱하던 시절이라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그러던 1963년 11월, 당시 창경원 수의관으로 근무하던 오창영은 서울에서 공연하던 서커스단 '심상복마희단'에서 철장에 갇혀 전시되던 벵가리를 발견하고, 그 크기와 위엄에 매료되어 서커스단장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중국인 단장 심상복은 대한민국에서의 흥행 실패와 사료 조달, 난방비 문제로 인해 창경원 측에게 동물을 구매해 달라고 오히려 사정사정을 했지만 벵가리만큼은 절대 판매할 수 없다는 입장이였다. 그러나 창경원 측의 거듭된 제의로 1963년 11월 11일, 창경원이 아라비안 말 등 여타 동물들을 벵가리와 함께 구매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1,300달러에 벵가리를 판매했다.
얼마 뒤인 1963년 11월 29일, 벵가리가 창경원 맹수사에 들어오게 된다. 처음 창경원에 들어온 벵가리는 숫사자의 하루 고기 섭취량인 5kg보다 3kg 더 많은 고기를 순식간에 먹어치우곤 양이 적다는 듯한 표정을 내지었으며, 벵가리가 야외 우리에 나오면 이웃 우리의 사자들이 한동안 내실에서 나오길 꺼렸다고 한다.
2.2. 신부를 물어죽인 호랑이
벵가리를 들여온 창경원 측에서는 늙은 21살의 백두보다는 나이가 어린 15살의 금강을 벵가리와 교미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 금강과 벵가리의 합사를 준비했다. 처음에는 벵가리와 금강을 벽 하나로 나뉜 우리 양쪽에 수용해 벽 너머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고, 한 달 뒤엔 서로의 방사장을 바꾸어 서로의 체취를 맡게 했으며, 또 한 달 뒤엔 철망을 덧댄 10cm 간격의 철책을 두 호랑이 사이에 두고 서로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 뒤, 철망을 떼어내고 철책만을 남기는 과정을 약 2개월간 거쳤다. 이런 과정이 지속되던 도중 금강과 벵가리는 철책 사이로 발을 내밀어 서로 핥거나, 몸을 비비는 등 서로에 대해 친근감을 쌓아갔다.당시 창경원 측은 합사 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합사를 주저했지만, 한달 뒤에 벵가리와 금강이 서로 친근한 행동을 다시 보이니 1964년 3월 7일[3]에 둘의 합사를 실행했다.
1964년 3월 7일 10시 20분경, 벵가리와 금강 우리 사이의 철책을 열었고, 금강이 먼저 벵가리의 우리로 향했으며, 서로를 핥고 코를 부비는 행동을 2분 정도 보인 이후, 금강이 자리에 앉아 교미 자세를 취했다. 벵가리는 금강의 외음부를 몇차례 핥은 뒤 금강의 위에 올라타 4~5회의 교미 움직임을 보였을 찰나, 돌연 금강이 벵가리의 성기 가시에 찔려 놀란 듯 몸을 돌려 위를 보고 누우면서 금강의 오른쪽 앞발이 벵가리의 왼쪽 뺨을 치게 되었다. 교미의 흥이 깨진걸로 모자라 갑자기 얻어 맞은 벵가리는 크게 분노하여 결국...
'금강의 머리를 앞발로 가격해 쓰러뜨린 뒤, 금강의 턱 밑을 물고는 크게 좌우로 흔든 뒤 놓지 않았다. 문 지 30초 만에 금강의 생명이 끊어졌고, 벵가리는 금강이가 죽자 턱 밑에서 목덜미로 옮겨 물고는 몇 차례 다시 금강의 시체를 흔든 뒤, 20분 간 시체를 끌며 방사장을 배회했다.
창경원 측은 토끼고기를 미끼삼아 금강의 시체를 벵가리로부터 겨우 빼내었고, 곧장 해부실로 옮겨 부검하였다. 벵가리가 첫 번째로 물었던 턱 밑은 근육과 혈맥이 끊어지고 목구멍이 으스러진 데다 인후에는 정확히 4개의 송곳니 구멍이 뚫려 있었다고 하며, 두 번째로 물었던 목덜미 부위는 두개골과 제1, 제2 경추골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고, 경추골엔 복합골절이 확인되었다. 부검을 끝낸 금강의 뼈와 살점은 구매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판매되었고, 가죽은 박제로 제작되어 창경원 표본실에 보관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아종 사이의 교배가 잘못이었다는 등, 체격의 차이가 너무 컸다는 등, 궁합이 맞질 않았다는 등, 교미 시기가 맞질 않았다는 등의 의견이 오고 갔으나, 정획한 이유는 불명이였다. 오창영은 저서 『오창영 동물기』에서 서커스 조련 중 모진 고문을 당해서 그에 대한 반발로 사나운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추정했다.
2.3. 죽음
이후 벵가리는 오창영의 미움[4]을 사 향후 10년 간 단독 사육되다가, 1974년 11월 쇠고기죽과 우유를 먹은 20분 뒤, 잠에 빠져들 듯 눈을 감고 자연사했다.[5]『오창영 에세이② 동물의 사랑학』에서는 벵가리의 폐사일자를 1974년 11월 28일로 기재했지만, 벵가리의 폐사를 보도한 동아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는 벵가리의 사망일자를 일괄적으로 11월 29일로 보도했다.
이후 벵가리는 박제처리 되었으며, 대전의 국립중앙과학관에 전시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3. 기타
어울림모터스의 어울림 뱅가리는 이 벵가리에서 이름을 따왔다.[1] 다소 논란이 있었다. 벵가리의 원 주인인 심상복마희단장 심상복은 벵가리가 만주에서 포획된 시베리아호랑이라고 주장했으나, 당시 창경원 부장인 오창영은 1965년 3월에 대한수의사회지에 작성한 논문인 『동물원종횡담(IV) - 호랑이의 괴변 -』에서 벵가리가 시베리아호랑이보단 벵골호랑이를 닮았다고 기술했다. 일단 논문 이후 1993년에 작성된 『한국동물원80년사 창경원편』의 묘사에 따르면, 창경원은 결과적으로 벵가리를 시베리아호랑이로 판단한 모양이다.[2] 이쪽도 아종 불명. 오창영이 1973년 7월에 작성한 논문인 『벵골 호랑이 (Panthera tigris tigris)의 폐(肺)디스토마증(症)』에서는 아종을 벵골호랑이로 기재했으나, 『한국동물원80년사 창경원편』의 300페이지에선 인도차이나호랑이로 기재했고, 오창영이 1965년 3월에 작성한 논문인 『동물원종횡담(IV) - 호랑이의 괴변』에서는 자바호랑이로 기재했다.[3] 벵가리와 금강의 합사 원문인 『오창영 동물기』와 『오창영 에세이② 동물의 사랑학』, 『한국동물원80년사 창경원편』에서는 합사, 사건 발생 일자가 1964년 2월 27일이라고 서술되어 있으나, 『동물원종횡담(IV) - 호랑이의 괴변 -』에서는 3월 7일에 있었던 사건으로 기록되어있고, 또한 해당 사건을 보도한 기사인 1964년 3월 7일 자 경향신문 7면 기사인『昌慶苑호랑이 變死』에서는 3월 7일 오전 11시에, 1964년 3월 7일 자 동아일보의 7면 기사인 『錯覺春情 昌慶苑숫범 암놈을咬殺』에서는 3월 7일 오전 10시 35분에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어 언론과의 교차 검증 시 1964년 3월 7일이 정확한 합사, 사건 발생 일자로 추정된다.#[4] 실제로 오창영은 저서 『동물이야기』에서 "영원히 그놈은 홀아비로 늙어 죽게 하리라."라며 울분을 토했다.[5] 늙어 고통스러워 하다가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