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16 14:56:52

박호문


박호문
朴好問
<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db9e00> 출생 미상
사망 1453년
함길도
본관 밀양 박씨
시호 정무(貞武)

1. 개요2. 생애

1. 개요

조선의 무관.

2. 생애

1419년 무과에 장원급제했다. 1430년 사복시소윤에 임명되고 제주 경차관으로 파견됐는데, 이때 잘못된 보고를 올려 직책을 삭탈당했다. 3년 뒤 직책에서 복직되었고, 호군 박원무와 함께 함길도 변경에 출몰하는 야인의 수장 이만주의 실태와 파저강을 정찰하고 돌아와 평안도절제사 최윤덕의 부장으로 출정해 파저강 일대의 여진을 정벌하였다.

복귀 후 봉상시윤이 되었으며 2달 뒤 대호군을 지냈다. 1434년에는 상호군으로서 겸사복윤이 되었다. 1436년 판회령도호부사가 되어 야인의 변경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회령절제사로 재임하던 시절 야인과 교류하고 결탁하여 형제를 칭하며 이적행위를 저질렀으며, 여진의 세력이 커지자 꾀병을 부리고 군무를 태만하였다는 죄와 김종서를 모함한 죄까지 더해 사형할 예정이였으나 전장에서의 전공으로 참작되어 곤장 100대를 맞고 유배되었다.

1447년 삭주절제사로 발탁되었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공조참판, 다음 해에는 사절단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 평안좌도 도절제사에, 다음 해에는 평안우도절제사가 되었다.

수양대군과 결탁해 김종서의 전 부하인 이징옥을 파직하고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이징옥은 박호문이 거짓으로 병조참판으로 임명한다는 어명을 전하자 믿지않았다.

이징옥은 처음엔 김종서가 살해된 사실을 모르고 한양으로 향했으나 사건의 진상을 듣고 본인이 위기에 처해있음을 깨달아 함흥으로 복귀했다. 박호문은 성문을 닫고 문 뒤에 숨었으나 빈틈을 보이자 이징옥이 화살을 쏴 사살했으며 시신은 참수했다.

사후 우찬성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