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朴子靑 |
본관 | 영해(寧海) 박씨 |
생몰년도 | 1357년 ~ 1423년 |
1. 개요
조선 전기의 무신. 하급무관[1] 출신으로, 정 2품 판한성부사[2] 자리까지 오른 실력자이자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건축가이다.2. 생애
고려 말 무신이자 조선 개국공신인 황희석의 하인 출신이였던 박자청은 조선 개국 후 궁궐 낭장[3]으로 들어가 있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중랑장[4]으로 승진하는데, 아마 조선 개국 공신이 된 황희석의 영향이 없지않아 있었던 것 같다.박자청의 원리 원칙은 계속 이어졌고 내상직에 있을 때의 근무 자세가 좋다고 평가되었는지, 호익사대장군으로 발탁되어 이성계의 고향 동북면을 지키게 된다. 이후 태종 이방원에 눈에 띄어 공조 전서[7]에 임명되었는데, 토목 건축 분야에 능력이 있었는지 대단한 기록을 세운다. 각종 건축물의 보수 공사를 시작으로, 제릉·건원릉 공사 감독, 도성 수축, 청계천 조성, 창덕궁 건설, 성균관 문묘 건설, 경복궁 경회루 건설을 완수했다. 특히 문묘는 4개월만에 완공시켰으며, 연못과 3층 건물이 같이 있는 경회루도 8개월만에 완공시키는 능력을 보여주었다.[8]
여러 공사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은 박자청은 1415년 지금의 서울시장격인 판한성부사에 임명된다. 그런데 1419년(세종 1년)에 태종(상왕)이 박자청을 하옥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태종이 박자청에게 창덕궁 인정문 밖 마당의 구역을 똑바로 직사각형으로 만들라고 했는데도 박자청이 뒤에 있는 산세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고집을 부려 명을 어기고 사다리꼴로 만들었다는 것. 태종은 그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측량을 게을리 했다는 명목으로 박자청을 하옥시키고 상량까지 한 행각[9]을 부숴버리라 명했고, 그 곳에는 담만 쌓게 하였다. 하지만 결국 한 달 후에 박자청은 사면되어 이후로도 계속 이 공사 저 공사를 맡게 되었고, 이후에 창덕궁 역시 박자청의 의도대로 사다리꼴 모습 그대로 행각이 지어졌다. 즉,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박자청이란 인물이 왕과 대립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한 그의 의도된 설계였다는 것.
1423년 세상을 떠나면서 익위(翼魏)라는 시호까지 받는다.
3. 평가
위 생애 파트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굉장한 능력과 소신을 지녔던 인물이다. 고려 시대 한 가문에서 일하던 하인이었지만, 왕조 교체라는 불안한 정국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장관과 서울시장 직까지 올랐으며, 필요하면 임금에게 대들기도 했지만 죽지 않았고 도리어 능력을 인정받아 죽은 뒤 시호까지 받았다. 당시 신생국가였던 조선은 한양 천도로 인해 새로 지을 건물이 많았는데, 박자청의 건축 재능과 빠릿빠릿한 현장감독 능력은 조정 입장에선 반드시 필요했다. 태종에게 신임까지 받은 그는 조선의 궁궐, 성곽, 하천 공사 등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건설을 모두 맡았다. 정도전이 한양 설계자였다면, 박자청은 그 계획을 실현한 인물이었다.그러나 박자청에게도 결점이 있었으니 바로 인성이었다. 실록에는 그를 두고 "성품이 각박하고 인정이 적다."고 평한 글귀가 남아 있다. 이런 사례가 하나 있다. 박자청이 공사 현장에 앉아 있는데 이중위라는 하위직 관리가 자기 앞으로 말을 타고 지나가자 건방지다며 그를 잡아 때려버렸다. 아무리 자신보다 품계가 낮다곤 하지만, 지나가던 사람에게 몸소 주먹질을 시전한 것이다. 결국 이 일은 이중위가 고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10]
거대 건축, 토목을 빠릿빠릿하게 예정보다 앞당겨서 해치우는 모습을 자주 보이지만 의외로 직무 태만 문제도 몇 번 있었다. 모화관 공사 때 예상 완공일을 넘겨 시간만 끌었다는 이유로 사헌부에게 탄핵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