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21:15:55

박용석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철도 테크노크라트로 정무원 총리, 제1부주석을 지낸 항일 빨치산 1세대 박덕산, 즉 김일의 아들이다.

2. 생애

1926년 6월 18일에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출생했다. 1928년 출생설이 있었으나 북한에서 발표한 부고와 애국렬사릉 묘비가 드러나면서 낭설로 밝혀졌다. 김일의 아들로 어릴 때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고 하나 해방 이후 빨치산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귀국했는데 이미 귀국할 때 스무살의 나이인지라 만경대혁명학원은 건너뛰고 바로 김일성종합대학 예비과에 입학, 소련 모스크바 철도운수대학까지 유학하였다. 아버지 김일을 따라서 김용석이 될 수도 있었으나, 김일성이 박씨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면서 박용석으로 하라고 해서 박용석이란 이름을 계속 쓰게 되었다.

귀국 후 1958년 당중앙위원회 교통운수부 지도원으로 배치되었다. 1961년 7월, 교통성 도시건설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962년 6월에 교통성 부상까지 승진했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69년 1월, 김갑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총정치국 부국장, 공군사령부 정치위원으로 일하면서 1969년 1월, 김창봉, 허봉학 숙청에 참여하였다. 그 공으로 1969년 2월, 당중앙위원회 부장에 이르렀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2년 9월 중앙위원회 건설운수부장에 임명되었다. 1972년 12월, 리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런데 신경불조화증이라는 병 때문에 잠시 일선에서 은퇴하여 쉬다가 1977년 4월에 정무원 철도부장에 임명되었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철도부장에 유임,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철도부장으로 1979년 6월까지 재임하다가 정무원 부총리 강성산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유임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고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6월에 중앙위원회 건설운수부장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1985년 9월, 김회일의 뒤를 이어 정무원 교통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86년 3월에 교통위원회가 철도부로 개편되면서 철도부장에 유임되었다. 1986년 12월, 8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철도부장에 유임,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이후 1990년 5월, 9기 최고인민회의에서도 철도부장 및 대의원에 유임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 출범 때까지 철도부장을 지내다가 10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내각제가 실시되자 김용삼에게 철도상 자리를 내주고 물러났다. 다만 대의원에는 재선되었다. 최영림이 밝힌 바에 따르면 철도부장으로 일하면서 김정일로부터 엄청나게 혼이 나곤 했지만 김일의 아들이란 것 덕분에 몰락하진 않았다. 이후 1993년에 사망한 검열위원장 리봉길의 후임으로 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정확히 언제 임명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99년 9월에 해당 직함으로 나타났다.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2004년 9월,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베이징에서 열린 제3차 아시아정당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리고 2006년 3월 미루벌 물길공사 참여 이후로 갑자기 안보이더니 2007년 3월 17일 15시, 전립선암으로 8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동지는 당과 수령의 높은 신임에 의하여 일찍부터 당중앙위원회와 무력부문, 국가경제기관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면서 당과 혁명대오의 일심단결을 튼튼히 다지고 인민군대의 전투력을 강화하며 사회주의경제건설을 다그치기 위하여 온갖 지혜와 정열을 바치였다."라고 그를 칭송하였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

  • 통일부 통일정책국 정치사회분석과, 북한의 주요인물 2009(서울: 통일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