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박수환(朴秀煥) |
출생 | 1886년 3월 7일 |
경상도 영해도호부 북면 원황리 (현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 | |
사망 | 1950년 1월 4일 (63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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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86년 3월 7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북면(현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에서 태어났다.그는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에서 정규하·신상문(申相文)·강삼인 등과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영해면 기독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은 경성부에서 3.1 운동의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서 영덕에 돌아와서는 이 사실을 군내 기독교계 주요 인사들에게 알리면서 영해면의 만세운동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 때 병곡면의 교회 장로 정규하는 구 영덕현 지역보다는 구 영해도호부 지역이 거사 장소로 좋다고 하여 3월 18일 영해면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월 18일 정오 무렵에는 정규하의 선창으로 준비해 온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 때 박수환은 3천여 명의 영해면·병곡면·축산면·창수면에서 온 시위군중을 이끌면서 영해 경찰관주재소를 에워싸고 일본 경찰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이 때 일본인 경찰부장이 시위대의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자 박수환 등은 일본인 경찰부장을 비롯한 일본 경찰 3명을 응징하는 한편, 주재소의 기구들을 파괴한 뒤 면사무소와 우편소 등 일제기관을 점령하면서 민족독립의 의지를 드높였다.
박수환 등은 이를 저지하려는 영덕경찰서의 일본인 서장을 비롯하여 일본 경찰 5명을 여관에 감금시킨 채 만세시위를 강행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다음날인 3월 19일에도 이어졌다. 3월 19일 아침에 시위규모는 더욱 늘어나 영해면을 진동시켰다. 이에 영일군에서 일본 헌병이 출동하였으나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손을 쓰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대구의 일본군 보병 80연대의 병력이 출동하면서 총격을 가함으로써 시위군중은 현장에서 8명의 순국자를 내고 해산하였다.
이 때 그는 체포되어 1919년 4월 22일 대구지검 경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공무집행방해·상해·건조물손괴·기물손괴·공문서훼기 및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공소하였으나, 그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그대로 유지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0년 1월 4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