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50:38

박도병

파일:박도병.jpg
성명 박도병(朴道秉)
경암(耕巖)
본관 밀양 박씨
생몰 1917년 11월 16일 ~ 2002년 2월 9일
출생지 경상남도 진주군 내동면 천전리
(현 경상남도 진주시 망경동)[1]
사망지 경상남도 진주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박도병은 1917년 11월 16일 경상남도 진주군 내동면 천전리(현 경상남도 진주시 망경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7년 3월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고 4월에 수원고등농림학교 농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1939년 4월에 정주영(鄭周泳), 임봉호(林鳳鎬) 등과 함께 학생결사 '한글연구회'를 조직했다. 한글연구회는 20여 명의 학생과 함께 한글을 연구하였고, 야학을 설립하여 농민 계몽에 힘쓰며 수원고등농림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940년 3월에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한글연구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지들과 시국에 대한 정보를 교환했고 한글 보급 등의 활동을 폈다.

그러나 한글연구회 회원이었던 김중면(金重冕)이 졸업 후 함경북도 갑산농업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다가 경찰에 체포되면서 한글연구회의 조직이 발각되었다. 박도병은 이에 연루되어 1941년 9월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1943년 3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제에게 요시찰 인물로 간주되어 감시받다가 8.15 해방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박도병은 이후 농학자가 되어 진주농과대학 교수, 경상대학교 농과대학 교수, 원로과학기술자문단 농수산부 원예분과 단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2002년 2월 9일 진주시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박도병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12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1] 인근의 칠암동·본성동·장대동·옥봉동·수정동·평안동·계동·봉곡동·상봉동과 함께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