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 2022년 1월 8일 (향년 81세), 경상북도 포항시 출생.
1. 개요
대한민국의 블루스 가수.2. 상세
당시 한국 블루스 음악의 개척자이자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금지된 명반 속에 유배되어 전설로 사라진 비운의 가수였는데 34년만에 <아름다운 날들>을 들고 돌아왔다. 국내 대중가요 사상 전무후무한 최고령 독집 취입 기록이다.화창한 봄날 서울 암사동 유적지에서 만났는데 "수 십 년 만에 음반 발표하고 인터뷰까지 하니 감개무량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노령이 믿기지 않는 다부진 체격이다. 동행한 프로듀서 김재욱은 "그간 박 선생님께 성인가요 음반을 내자는 제안은 많았으나 블루스 음악에 대한 고집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며 이번 음반제작이 쉽지 않았음을 털어놓았다.
5.16 혁명 때 부친의 신상 문제로 집안이 쫄딱 망했다. 깡패가 될 것 같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원입대를 했다. 제대 후 1962년 국민대학교 행정과에 입학했지만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자퇴를 했고 한국배우전문 학원에서 1년간 연기 수업을 했다. 원로 탤런트 민지환이 그의 연기 동기생이다.
꿈은 그리 원대했지만 끼니를 걱정했던 배고픈 시절이었다. 가수가 된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1964년 미군 오디션을 통과해 의정부의 하우스 캄보밴드에 들어갔다.
블루스를 노래하는 유일한 가수였는데 흑인 병사들에게 인기가 엄청나자 서울에서 온 쇼 단장이 3배의 개런티로 그를 스카우트했고, 전국의 클럽을 돌던 패키지 쇼 가수가 된 그는 1년 후 한국흥행에 성공하여 빅쇼 무대로 진출했고, 동양방송 쇼쇼쇼에도 출연했다.
이후 1968년에 영사운드, 1970년에 김상희의 스페셜 쇼, 1971년에는 록그룹 '비 블루'와 영 에이스를 거치면서 실력 있는 가수로 성장했고, 소문을 들은 신중현이 찾아와 팀 결성을 제안했다. 그가 최고의 그룹으로 평가받는 신중현 밴드 '더 맨'의 리드보컬이 될 때까지의 일이다.
신중현과 첫 음반 녹음이 한 창이던 1972년, 10월 17일 군사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정권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첫 음반 <장현과 더 맨>이 탄생했다. 이 음반은 <아름다운 강산>의 오리지널 버전이 수록된 명반이다. 음반의 곡중 <잔디>는 그가 좋아하던 곡이다. [1]
가장문제는 역시 <아름다운 강산>이었다. 리더 신중현이 '박 대통령의 노래를 만들라'는 청와대 전화청탁을 거절한 후 멤버 모두 통제와 장발단속으로 시달렸다. 항의 표시로 박씨는 삭발을 하고 MBC 쇼프로에 출연했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장면을 현란한 조명으로 조롱하며 감행한 18분에 걸친 <아름다운 강산> 연주는 일종의 음악 시위였다. 이후 이 음반은 퇴폐로 몰려 금지되었다.
이후 발표하는 음반마다 불운의 연속이었다. 1973년에 나온 첫 독집은 시작은 좋았다. 각각 방송 PD와 유명 DJ들이 서로 '매니저를 하겠다'고 덤벼들었다. 회사도 그를 주력 가수로 밀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한 곡도 방송을 타지 못하고 음반은 또다시 금지됐다.
1980년에 해금이 되었다. 작곡가 김희갑이 음반 제작을 제안했다.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는 <검은 눈망울>이란 노래가 있었는데 라이브 무대에서 남성적인 분위기로 이 노래를 부르면 신청이 끊이질 않았다. 이 곡은 나중에 양희은이 불러 큰 인기를 얻은 <하얀 목련>의 오리지널 곡이다. 그러나 김희갑과는 노래에 대한 견해차가 계속됐고 음반 제작은 결국 무산됐다.
1981년, 사랑과 평화 최이철의 제안으로 어렵게 2번째 독집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제작사 유니버셜의 제작이 끝나고 이틀 만에 문을 닫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이 음반도 나오지 못하고 사장돼 버렸다.
3. 사망
2022년 1월 8일, 향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빈소는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동 쉴낙원 서울장례식장으로 마련됐으며, 발인날은 1월 10일 오전 10시이다.[1] 하지만, 이 노래 때문에 대마초 사건이 일어난 당시 엄청나게 금지된 명반 속에 유배를 당하고, 욕을 먹게 된 이유이다. 참고로 잔디는 대마초의 경상도 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