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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6세/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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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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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1. 개요2. 교회 현대화
2.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완수
2.1.1. 전례 개혁
2.1.1.1. 성청(聖廳) 개혁
2.1.2. 현대 세계와의 관계 재정립
2.1.2.1. 사회 정의
3. 교회 일치 운동4. 순례자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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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62대 교황이었던 바오로 6세에 대한 평가를 다루는 문서.

2. 교회 현대화

2.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완수

전임자였던 요한 23세의 선종 이후 중단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빠르게 재개하여 개혁을 매듭지었다고 평가받는다.

2.1.1. 전례 개혁

54. 이 헌장 제36항의 규범에 따라, 백성과 함께 거행하는 미사에서, 특히 독서들과 ‘공동 기도’에서 그리고 지역 상황에 따라 백성과 관련된 부분들에서도 모국어에 알맞은 자리가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신자들이 라틴어로도 자기들과 관련된 미사 통상문의 부분들을 외우거나 노래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 #

그가 진행한 2회기부터 4회기 동안 가장 많은 개혁적인 결과가 나왔는데, 대표적으로 미사에서 사용되는 전례 언어를 라틴어에서 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꿀 것을 권장하였다. 그 전까지 미사는 라틴어로만 진행되었으며, 대부분의 신자들은 미사 중에 무슨 내용이 진행되고 있는지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 변화로 신자들이 미사를 더 잘 이해하고, 그들의 신앙 생활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결과가 나왔으며, 미사 외에도 기도와 성경 낭독 등에서 각국의 언어가 사용되면서, 교회의 활동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다.#
2.1.1.1. 성청(聖廳) 개혁
교회의 중앙행정 기구인 로마 꾸리아(성청)의 변화는 파격적이었다. 과거 꾸리아의 부서들이 간소화되고,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의 필요를 반영하는 새로운 부서들이 생겨났다. 최고 부서인 성성(聖省)에는 처음으로 주교들이 추기경들과 함께 활동하게 되었고, 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이 꾸리아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교황청 국무원의 기능은 강화되어, 사소한 문제라도 거의 모든 꾸리아 업무를 검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중앙집권화는 성청 각 성성의 추기경 장관들이 자치적으로 관리하던 노쇠한 추천제도의 벽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각국 주교단은 로마에서 주요 교서들이 서명되기 전에 검토할 기회를 요청했으며, 그 결과 이 기회를 얻게 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성청홍보국과 홍보위원회의 설립이었다. 평신도와 정의평화부서도 잠정적으로 설립되었다가, 후에 더 중요한 꾸리아 부서로 자리 잡았다.

바오로 6세는 크리스찬 일치국과 비 그리스도교국을 신설했으며, 이 두 부서는 꾸리아 내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부서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특히 비 그리스도교국은 공의회의 뜻을 따라 이슬람교도, 불교도,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및 비 그리스도교인들과의 대화의 문을 열었다.

교황재위 말기에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새롭게 등장한 국제적 성격을 가진 꾸리아 간부들 사이에서도 비잔틴풍의 절차와 비밀이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오로 6세가 자신의 재위 동안보다도 현대적 요구를 반영하는 꾸리아를 구축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1.2. 현대 세계와의 관계 재정립

그러므로 인류가 만들었고 또 끊임없이 만들고 있는 극히 다양한 단체들에서 발견되는 참된 것, 좋은 것, 옳은 것은 무엇이든 이 공의회는 커다란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본다. 더욱이, 교회에 소속되고 자신의 사명과 합치될 수 있는 한, 교회는 이 모든 단체를 도와주고 증진하기 바란다고 선언한다. 인간과 가정의 기본 권리와 공동선의 요구를 인정하는 어떠한 체제 아래에서든, 교회는 모든 사람의 행복에 봉사하면서 스스로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는 것 말고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

헌장 "기쁨과 희망"은 교회가 과학, 기술,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으며, 교회가 세속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거리를 두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접근은 당시 교회가 직면한 현대 세계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전환을 의미하며, 바오로 6세 교황의 지도력 아래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헌장이 작성될 당시,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황으로서 교회의 교리적 기초 위에 구체적인 사회적, 윤리적 지침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의회 초기에 바오로 6세는 교회가 현대 사회와의 관계에서 전통적인 관점을 넘어서서 인간 존재와 사회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이러한 시각은 바오로 6세가 교회의 평화적 역할을 중시하고, 국제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길 원했던 그의 지도 철학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제시된 핵심 메시지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에 대한 교회의 깊은 존중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회가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소극적이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 공의회는 ‘사회 정의’와 ‘평화’의 추구를 교회의 주요 임무로 삼았으며, 교황은 이러한 가치들을 교회의 가르침에 실질적으로 반영하려 했다. 바오로 6세의 이러한 노력은 교회가 시대 변화에 맞춰 지속적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1.2.1. 사회 정의
바오로 6세는 1967년 발표된 회칙 "민족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에서 현대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처음으로 적용한 교황이었다. 또한, 교황은 교회의 사회적 활동과 사회적 사고를 적극적으로 촉진하기 위해 교황청 내 새로운 부서를 신설했다. 그가 설립한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는 법적, 행정적 임무를 넘어서 사회적 목적을 위해 설립된 첫 번째 성청 기구였다.

이 위원회를 통해 교황은 개인적으로 또는 외교 채널을 통해 인권 침해나 다른 사회적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발언을 이어갔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바오로 6세 하의 교황청 사절들이 교회 내 진보적인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을 봤다. 특히, 브라질 주교회의가 시작한 국제 사회 정의 연구 계획에 대한 교황청의 후원을 거부한 일이 그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지방 교회들에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할 자유를 주고자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특히, 사회 문제의 복잡성을 깊이 이해한 교황은 전체 교회에 일률적인 사회교리를 적용하지 않았으며,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교황과 성청이 제공한 사회문제에 대한 원칙이나 의견들은 앞으로 지방 교회의 활동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3. 교회 일치 운동

파일:external/saltandlighttv.org/PAUL-19-001.jpg
<colbgcolor=#ffe100>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아티나고라스 1세와 함께
1967년 7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아티나고라스 1세이스탄불에서 만나며 함께 포옹하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역사적인 역사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이와 함께 동서 대분열 이후 1000년가량 이어져온 상호 파문 역시 끝냈다. 1964년 9월 14일 시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제3회기때는「동방 교회에 관한 교령」들을 발표하며 교회 일치에 적극적으로 힘썼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공적인 결실을 이끌어 낸 것과 함께 동방 교회와의 대화를 통해 교회 일치 토대를 놓고 다른 그리스도교 교회들과 평화 화해를 회복하려 노력했던 점은 바오로 6세의 가장 큰 치적으로 손꼽힌다.#

4. 순례자 교황

다섯 개 대륙을 모두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다. 당시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 여행한 교황으로 ‘순례자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64년 세계성체대회 개최지인 인도 뭄바이를 방문해 최초로 아시아 땅을 밟은 교황이 됐으며, 이듬해에는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을 사목방문했다. 1968년에는 남아메리카의 콜롬비아를 방문해 보고타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와 메데인에서 개최된 제2차 라틴아메리카주교단 총회에 참석했다. 1970년에는 홍콩과 필리핀, 호주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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