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개명 | 민영덕(閔泳悳) |
본관 | 여흥 민씨[1] |
출생 | 1874년 11월 19일 |
충청도 단양현 조산면 현곡리 (현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 |
사망 | 1926년 4월 8일 |
경기도 용인군 | |
묘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 상선장마을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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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민영팔은 1874년 11월 19일 충청도 단양현 조산면 현곡리(현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서 아버지 민병호(閔昞鎬, 1836 ~ 1901. 4. 26)와 어머니 우봉 이씨(1842 ~ 1919. 7. 22)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숙부 민진호(閔晉鎬, 1848 ~ 1864. 12. 24)에 입양되었다.1894년 1월 3일 종9품 친군총어영 협여초관(親軍摠禦營挾輿哨官)에 제수되었다가, 그해 9월 3일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는 1907년 이명상(李明相)과 함께 이강년의 의병대에 가담하여 강원,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했다. 황성신문 1908년 1월 8일자 기사에 따르면, 그는 이명상과 함께 70명의 의병을 이끌고 청풍군 조령에서 일본 순검대와 교전했다고 한다. 이후 1909년 4월 경 김상한(金商翰)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하여 경북과 충북 일대에서 활동했고, 1909년 5월부터 1910년 3월까지 충주, 단양 일대에서 20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유격전을 전개했다. 1909년 5월 24일 부하 21명과 함께 충주면 덕산면을 내습했고, 5월 25일에 부하 60명과 함께 단양군 남면 적곡리를 내습했다. 그러나 1909년 5월 24일 충주군 덕산면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받고 문경 방면으로 후퇴하다가 홍천에서 체포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일제의 감시가 거세지자 경기도 용인군으로 이주하여 은거했고#, 1926년 4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민영팔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그의 후손을 찾지 못해 한동안 건국훈장을 전달하지 못하다가 5년이 지난 2015년 11월에 민영팔의 손자 민병진(閔丙鎭, 1925년생)옹에게 건국훈장을 전달할 수 있었다.#
[1] 삼방파 28세 영(泳)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