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문창래(文昌來) |
호 | 동롱(東聾) |
본관 | 남평 문씨[1] |
생몰 | 1885년 5월 15일 ~ 1951년 6월 1일 |
출생지 | 전라도 제주목 (현재 제주도 제주시 애월면 애월리) |
사망지 | 해난사고 |
추서 | 대통령표창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문창래는 1885년 5월 15일 전라도 제주목(현재 제주도 제주시 애월면 애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대 애월면장으로 재임하다가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독립군자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7월 이 일이 탄로나 조봉호(趙鳳鎬)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9월 25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정사법(政事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6월이 선고되어 항소하였으며 11월 12일 무죄로 확정되어 석방되었다.1920년대 초 목포로 이주한 그는 ‘제주물산주식회사’를 세웠으며, 동아일보 목포지국을 1년 4개월 동안 운영하였다. 1923년 11월 명신학회 간사로 사립 명신학교의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힘썼으며, 민립대학설립 제주본부의 총회에서 감사로 선출되었다. 1923년 제주도와 오사카 간 직항로가 개설된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조선우선회사(朝鮮郵船會社)와 이기회사(尼崎會社)가 항로를 개설한 이후 독점 운행하고, 1928년에 들어서 배삯을 대폭 인상하였다. 이에 그는 1928년 4월 제주도민대회를 열고 자주운항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3월 ‘제주통항조합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고, 4월 21일 오사카 거주 제주 출신 재일교포들을 조합원으로 가입시키고, 명칭을 ‘동아통항조합’으로 개칭하였다. 같은 해 6월 6일 ‘조합뉴스’ 창간호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보천교 신자로, 주위에 보천교를 포교했고 서양 종교와 일본 문화 등을 반대했다. 그러나 1950년경 부인과 함께 모종의 인물에게 연행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족보에서는 위와 같이 사망일자와 사망 원인이 기재되어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문창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 헌납공파 두수문중 다호파 27세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