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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언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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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맹은원.jpg
중화민국 1대 길림독군
정체 孟恩遠
간체 孟恩远
한국식 독음 맹은원
영문 Meng Enyuan
서춘(曙春)
출생 1856년
청나라 직예성 천진시
사망 1933년 (향년 76~77세)
중화민국 톈진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없음
직업 정치가, 군인

1. 개요2. 생애
2.1. 길림의 지배자2.2. 호법전쟁과 몰락2.3. 말년
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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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장쭤린의 초기 최대 경쟁자였으나 호법전쟁 이후 동삼성순열사에 임명된 장쭤린에게 밀려 몰락했다.

2. 생애

2.1. 길림의 지배자

1856년 직예성 텐진 출신. 일개 졸병으로 정무군에 입대했다가 1895년 톈진 소참에서 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 창설에 참여, 우익기병영대관, 북양육군 제5진 마표표통, 직예순방영 통제, 남양진 총병 등을 역임했다. 1907년 쉬스창을 따라 길림순방영독판, 북양육군 제23진총제에 임명되었으며 1912년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23사단장 겸 길림호군사가 되었다. 1914년 6월 진안 좌장군, 길림장군, 길림성 군무독리로 승진했고 위안스카이 사후 길림성 독군에 임명되었다. 1917년 장쉰선통제를 복벽시킨 장훈복벽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길림성 순무에 임명되었으나 돤치루이가 장쉰을 토벌하면서 물건너갔지만 오랜 세월 길림성을 다스려온 멍언위안인지라 계속 길림성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그런 멍언위안을 끌어내린 것은 다름아닌 이웃한 봉천성의 지배자가 된 장쭤린이었다. 장쭤린은 돤치루이에게 멍언위안은 장쉰으로부터 순무로 임명된 오염된 인물로 마땅히 면직시켜야 한다고 참소했다. 돤치루이는 장쭤린의 주장을 수용하여 1917년 10월 18일 멍언위안을 길림독군에서 면직하여 성위장군으로 발령시키고 톈중위를 후임 길림독군에 임명했다. 하지만 휘하의 23사단을 비롯하여 강력한 지반세력을 가지고 있던 멍언위안은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멍언위안의 조카 고사빈은 길림성 독서 참모장 겸 사단장이었고 멍언위안의 사돈은 직예군벌의 실력자 육건장이었다. 이 때문에 멍언위안은 길림독군에서 면직되었음에도 여전히 위세를 떨칠 수 있었다.

2.2. 호법전쟁과 몰락

이러한 세력균형이 바뀐 것은 1917년 호법전쟁이 발발하면서였다. 호법전쟁에서 멍언위안도 쉬수정으로부터 니시하라 차관 중 1천만원을 지급받는 등 어느 정도 수혜를 받았으나 최고 수혜자는 장쭤린이었다. 호법전쟁에서 돤치루이를 도와 남하했던 장쭤린은 세력을 확장하였음은 물론 1918년 9월 7일 동삼성순열사에 임명되어 명목상 동삼성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1919년 6월, 장쭤린은 멍언위안을 몰아낼 때가 왔다고 판단, 대총통 쉬스창에게 전문을 보내 길림독군에 자신의 사돈인 흑룡강독군 포귀경을 임명하고 흑룡강독군에는 자신의 심복 손열신을 임명해달라고 추천했다. 쉬스창은 장쭤린의 제안을 비준하였고 1919년 7월 6일 멍언위안을 길림독군에서 해직하여 혜위장군으로 임명했다.

멍언위안은 이미 60의 노인이었고 길림성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린 상태였기 때문에 이번 인사명령을 수용하여 톈진으로 이주, 부유하고 평안한 말년을 보내고 싶어했으나 멍언위안의 조카 고사빈과 고봉성이 극렬 반대하며 장쭤린과 무력으로 대결하자고 주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쭤린은 즉각 손열신을 길림 토벌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길림성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장쭤린이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세력이라는 것을 잘 알았던 멍언위안은 즉각 전문을 보내 길림독군의 대권을 넘겨줄 테니 자신과 부하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해달라고 요청했다. 장쭤린은 이를 수락, 1919년 8월 5일 길림에서 포귀경과 멍언위안이 만나 독군의 인장을 인수인계하였다. 멍언위안은 재산을 챙겨 텐진으로 이주했고 고사빈과 고봉성은 변장하여 해삼위로 달아났다가 다시 배를 타고 톈진으로 떠났다. 이후 손열신이 흑룡강독군 겸 흑룡강성장에 임명되었고 포귀경이 길림성을 장악함에 따라 장쭤린이 만주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제국령 조선 국경에 주둔한 일본군과의 충돌이 발생하는 일이 있었으나 어찌어찌 마무리되었다.

2.3. 말년

1922년 1차 직봉전쟁에서 장쭤린이 패하자 멍언위안은 양호순열사 우페이푸에게 자신에게 길림독군 자리를 되찾아달라고 로비를 했지만 우페이푸는 독군 자리를 원한다면 자신의 손으로 되찾으라고 냉정하게 거절했다. 멍언위안이 이에 대해 불평을 터트리자 멍언위안의 조카 고사빈은 우페이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겨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만주로 숨어들었다. 그는 과거 멍언위안의 부하였던 노영귀를 포섭하여 우페이푸로부터 토역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하얼빈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하얼빈 헌병대 대대장 장쭝창에게 패해 죽었다. 멍언위안은 이후로도 톈진에 거주하다가 1933년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直皖戰爭과 奉天軍閥의 關內進出, 송한용, 중국사연구 28권 28호, 중국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