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37:43

마천룡

성명 마천룡(馬天龍)
이명 마건(馬建), 마인룡(馬仁龍), 마천용(馬天容)
생몰 1894년 4월 4일 ~ 1933년 11월
출생지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면 불로동
사망지 만주 지린성 돈화현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마천룡은 1894년 4월 4일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면 불로동에서 독립운동가 마진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이주했고, 1914년 간도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졸업하고 부친 마진이 북간도국민회장이 된 후 동지 규합과 청년 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도왔으며,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에 가입했다.

1919년 만주 지역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참여한 마천룡은 그해 대한국민회군에 입대했고, 1920년 4월 국민회 군무위원에 선임되어 이광(李光), 고덕승(高德承), 홍범도 위원과 함께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연해주 노령까지 갔다 왔다. 또한 그해 8월에는 홍범도 부대의 일원으로서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일제가 간도 참변을 단행하며 독립군을 압박해오자, 마천룡은 홍범도와 함께 시베리아로 이동했지만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을 목도했다. 10월에 연해주로 이동한 그는 서간도 군비단과 북간도 국민회가 통합하여 결성된 대한의용군사회에 가담해 무관훈련반에서 5개월간 수학했고, 재무부 모연원을 맡아 군자금 모집에 참여했다.

1921년 11월과 12월에는 김홍일이 지휘하는 대한의용군 제2중대 제1소대장을 맡아 연해주의 백군에 맞서 볼로차에프스크 전투, 이만 전투를 치렀고, 백군이 진압된 후인 1923년 1월에 부친과 함께 적기단 결성에 참여해 동만 사령부장이 되었다. 1923년 8월에는 연길현 옹성랍자에서 장기영(張基永), 주건(朱建)과 함께 고려공산당 만주지방위원회를 구성했으며, 뒤이어 명월구 장흥항 간민학교 교사로 부임해 학생들에게 사회주의 이론을 전파하는 동시에 고려공산당 조직 활동에 종사했다. 1926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결성되자 여기에 가담해 옹성랍자 야체이카를 건립했다.

1926년 12월 만주총국 내 화요파의 독주에 반발한 상해파 인사들이 고려공산당을 집단 탈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마천룡은 여기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만주총국에서 제명되었다. 하지만 곧 당적을 회복하고 옹성랍자 야체이카의 책임자가 되었고, 1929년 2월 돈화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에 참여했으며, 그해 8월에는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 만주부 검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930년 4월 주건과 함께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마천룡은 동만특위 조선국내공작위원회의 일원으로서 국내에서 공산주의에 감화된 노동자들이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을 후원했고,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 했다. 1930년 5월 17일 지린성 돈화현에서 부친 마진과 동생 마천목(馬天穆)이 일본군에게 살해되자, 그는 이에 원한을 품고 그해 10월에 중국공산당 연화혁명위원회 군사위원이 되어 적색자위대 창설을 위해 노력했고 평강 및 옹성랍자 일대에서 반일운동을 지휘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항일유격대 조직 사업에 종사했고, 연길현 왕우구, 왕청현 소왕청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밀려 더이상 만주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1933년 11월 소련으로 이동하다가 만주와 소령 국경에 매설된 지뢰를 잘못 밟아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마천룡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