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1] ~ 1966년 6월 7일
1. 개요
중화민국의 외교관.2. 생애
1897년 청나라 후베이성 이창부(현재 중화인민공화국 후베이성 이창시)에서 태어났다.1916년 우창현(武昌縣)[2]에서 문화학교(文華學校)를 졸업하고 칭화대학에 입학했다. 칭화대학 재학 중에 학생회 평의위원회 주석을 역임했고, 1920년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해 오벌린 칼리지(Oberlin College)에서 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1924년 귀국해 전국 기독교청년협회 학생 간사, 기독교 우한시 청년회 총간사 등을 역임하고 화중대학(華中大學)[3] 교수직을 겸임했다. 1929년에는 전국 건설위원회 총간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저장성 건설인원양성소 훈육주임에 임명되었다가 이후 양성소장으로 승진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태평양국제학회 중국분회 간사에 초빙되었고, 1933년에는 집행간사로 승진해 1946년까지 역임했다. 또한 그 사이 중화민국 국민정부 철도부·교통부 총무사 방판(幫辦) 겸 인사과장, 경제부 물자국 쿤밍 판사처장 등을 역임했다.
1945년 6월 주 일본 연합군 본부 중국 대표로 파견되었고, 11월에는 주 경성부 공사 직함 대우 중화민국 총영사가 되어 파견되었다. 1948년 8월에는 주 대한민국 대사 외교대표로 특파되어 유엔 주 대한민국 위원회 중국 수석 대표 및 주 대한민국 위원회 주임위원을 겸임했다.
1950년 6월에는 주일대표단 (대사 직함) 부단장이 되어 일본을 다녀왔고, 1951년 1월에는 주 유엔 대표 판사처 고문에 임명되어 유엔총회 상임위원회 중국대표단 비서장을 역임했다. 1953년 1월에는 주 유엔 대표판사처장을 겸임했다. 1957년에는 주 쿠바 전권공사 겸 주 아이티 공사에 임명되었고, 그해 9월 주 쿠바 특명전권대사로 승진했다.
1961년 1월 주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에 임명되었고, 1964년 3월 주 태국 특명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66년 6월 7일 태국에서 열린 범 화교 국가 토론회에 출석해 베이징시 이화원 개수당(介壽堂)에 중국어 연수반을 개설하는 것에 대해 토론하던 중, 심장병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죽었다. 향년 70세.
3. 한국에 끼친 영향
사실은 임시정부 요인들(특히 김구)과 몹시 친하게 지냈으며 미군정, 중화민국에 임시정부를 긍정적으로 말해주었던 인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백범 김구의 아들, 김신이 훗날 중화민국 대사가 되자 자주 방문하였다고 한다. 김신이 썼던 자서전 조국의 하늘을 날다에서도 류위완과 찍은 사진이 나와있다.4. 유어만 회담록
여기까지 보면 김구와 임정에게만 매우 호의적인 인물이겠지만 사실 김구와 이승만 사이를 악화시키기도 했다. 그는 김구와 대화를 나눈 뒤 유어만 회담록을 만들어서 이승만에게 건네주었다 한다. 유어만 회담록당시 류위완은 장제스의 지령을 받아 김구에게 가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가하라고 말했지만 김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金()김구_: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南進(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지금 잠깐은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져있지만,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김구의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위 발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
긍정적 해석으로는 김구가 남북한의 군사력 현실을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에 자신이 평화적 통일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북한의 군사력이 짧은 시간 동안 대단히 신장돼 남한과 비교할 수 없다게 됐다는 정세 판단을 했을 뿐이고, ‘소련이 북한군을 남한으로 투입시켜 단시간에 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는 것은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가정(假定)이며,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남북의 평화적 협상과 통일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했다는 것이 취지라고 해석하는 입장이다.
부정적 해석으로는 북한군이 남침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전쟁이 없다’는 위선적 발언을 했고, 대한민국이 멸망하리라 예상했기 때문에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면서, 북한이 멀지 않은 시기에 남한에 군사적 공격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군사력 차이 때문에 도저히 남한은 버틸 수 없으리라고 예견했으며, 이것을 유어만과의 비밀회담에서 털어놓은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런 판단을 한 사람이 겉으로는 남북협상 당시 북한을 떠나기 전에 발표한 4·30 공동성명에서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은 부정적 해석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이는 곧 김구가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곧 멸망할 나라에 왜 참여하느냐’는 생각 때문이었음이 드러났다는 해석이 되고, 대세(大勢)는 북한 주도의 통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굳이 이승만과 손을 잡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던 것은 과연 무슨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아울러 유어만과의 대담에서 김구는 정부 수립에 참가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승만은 한국민주당의 포로나 마찬가지여서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며 민족적 중도주의론을 설파했으며, 첨언하여 미국과 중국 양국만이 한국 독립에 도움이 되는 줄 아는데, 특정 정당의 비방에 의해 반미로 몰렸기 때문에, 만일 정부 수립에 가담한다면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미국인의 동정심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될 것이라며 이와 같이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