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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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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주동맹 부주석
정체 羅隆基
간체 罗隆基
한국식 독음 나융기
영문 Luo Longji
노생(努生)
출생 1896년 7월 30일 청나라 장시성 안푸현
사망 1965년 12월 7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직업 정치가, 교수
종교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중화민국의 민주주의자2.3. 중국민주동맹의 부주석2.4. 몰락
3. 가족관계4. 저서5. 참고 문헌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중국민주동맹의 창립자 중 한명이며 현재까지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우파'로 매도당하고 있는 5명 중 한 사람이다. 1921년 미국으로 유학가서 위스콘신대학과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후, 런던 정치경제대학으로 가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중국으로 돌아가 민주주의자로서 장제스의 독재에 맞섰고 1941년 중국민주동맹을 창당해 중앙 부주석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정무원 위원, 산립공원부장, 정협전국위원회 상무위원, 전인대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으나 1957년 반우파 투쟁으로 몰락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뤄룽지는 1896년 7월 30일[1] 장시성 안푸현 풍전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지방의 유지였고, 아버지는 유학자였다. 그는 아홉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고문과 고전시를 탐독하는 걸 좋아했다. 또한 어릴 때부터 총명해 주변인들로부터 신동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13년, 뤄룽지는 베이징에 있는 칭화대학교에 입학했다. 칭화학교는 미국유학을 위한 예비학교로 1911년에 설립되었다. 초중4년(우리나라의 고등학교 과정)과 고중4년(우리나라의 대학교 과정) 그리고 미국유학까지의 전과정을 무료로 공부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뤄룽지는 칭화학교의 8년 정규과정을 훌륭히 이수해 유학을 갈 자격이 주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1919년 5.4 운동 당시 칭화대학교에서 학생회장을 제치고 자신이 직접 학생운동을 지도했다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학교 당국에 의해 자퇴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유학을 준비했고 1921년 국비 유미학생에 뽑혀 위스콘신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차례로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시카고에서 국가주의 운동을 이끄는 대강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1년 후에 다시 영국으로 유학을 가 런던 정체경제대학교에 입학했다. 영국에서의 유학 시절 그를 지도한 교수는 영국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주창자 해럴드 라스키였다. 뤄룽지는 라스키 교수의 애제자가 되었고 그의 도움에 힘입어 박사학위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2.2. 중화민국의 민주주의자

뤄룽지는 1928년 중국으로돌아가 상하이 광화대학의 교수로 부임했고 후스, 쉬즈모(徐志摩) 등과 함께 <신월(新月)> 잡지를 창간해 편집장을 맡았다. 1929년 7월 뤄룽지는 신월에 "중국은 인권 유린을 감춰서는 안된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그는 인권 운동을 개시해 국가의 국민 보호 의무를 준수하게 할 필요가 있으며 유럽과 미국의 정치 교리에 따라 정부가 준수해야 할 35개의 인권을 열거했다. 그후 그는 국민당의 독재 정치를 규탄하다가 1930년 11월 체포되어 강도 높은 심문 조사를 받았고 광화대에서 제적되어 중국 교학에서 교직을 맡았다.

그러던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뤄룽지는 상하이 각 대학에서 공개 강연을 하며 무력 항일을 주장했다. 이후 1932년 1월에 천진으로 가서 <익세보(益世報)> 잡지 주필을 맡았고 난카이 대학의 장보링(張伯苓) 총장의 초빙을 받아 난카이대학 정치학과 교수에 부임했다. 뤄룽지는 익세보에서 "한 나라에 세명의 공사관", "전쟁도 가능하다", "대일 방침을 재논의하자","공산당에 대한 정부의 승리는 영예롭지 않다", "외부와의 왕래를 끊으면 안일해질 수 있다" 등 여러 사설을 집필해 정부의 공산당 토벌 우선 정책과 일본에 대한 유화책을 비판했다.

1933년 가을, 뤄룽지는 차를 타고 가던 중 채광사 부근에서 총격을 받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국민정부의 압력을 받은 익세보는 뤄룽지를 해고했다. 그후 야인으로서 세월을 보내던 그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익세보에 고용되어 항일을 주장하는 사실을 여러차례 집필했으나 일본군이 천진을 점령하자 충칭으로 이동했다. 이후 그는 장제스의 항일 투쟁을 적극 지지하며 국민들에게 일본에 맞설 것을 촉구하는 사설을 여러 편 집필했다.

2.3. 중국민주동맹의 부주석

1941년, 뤄룽지는 중국민주동맹 창설에 적극 참가해 중앙 상무위원 겸 선전부장이 되었다. 중국민주연맹은 국민당에 속하지 않았지만 공산당을 지지하지도 않는 제3의 정치세력이었으며, 소련의 사회주의 경제체제와 영미식의 민주적인 정당 의회제도를 결합하여 중국 사회주의 정치와 경제 체제를 새롭게 건설하려는 이상을 당강령으로 채택했다. 그는 장란(张澜), 선쥔루(沈钧儒) 등과 함께 중국민주연맹 소속 정치인으로서 전국정치협력위원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국민당이 환남사변을 벌이고 팔로군 장성들을 반역자로 몰자, 그는 "힘을 합쳐 일본과 싸워도 어려운 시국에 내분을 일으켰다."며 국민정부의 행위를 맹비난하고 위원회를 떠나 쿤밍으로 내려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쿤밍에서 민주연맹 쿤밍지부를 창립하고 주임위원을 맡아 쿤밍 항일운동을 적극 추진했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확대했으며 공산당에 노골적으로 불신을 드러내며 그들을 제거하려 드는 국민당 보수파를 "대의를 잊고 당세 확보에 골몰한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 뤄룽지는 충칭, 난징, 상하이에서 머무는 동안 민주화 운동에 매진했고 저우언라이, 둥비우와 밀접한 교류를 가지며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주요 문제에 대해 중국 공산당과 긴밀한 협상을 벌였으며, 공산당 토벌 명령을 내린 장제스에게 격렬히 항의하며 내전 중단을 촉구했다. 1946년, 뤄룽지는 칭화학교 동기이자 신월파 공동 창간인인 원이둬(聞一多)가 암살당한 후 열린 추도식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감옥살이의 고초와 피 흘리는 희생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민중의 자력과 인간다운 삶입니다. 국민이 스스로 삶을 도모해 나갈 수 없는 나라는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국민정부는 이렇듯 사사건건 자신들을 비판하고 공산당에게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는 그를 가택에 연금시키는 조치를 취했으나, 그는 1948년 중국 공산당의 도움으로 해방구로 탈출했다. 1949년 9월, 뤄룽지는 중국민주연맹 대표 자격으로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 참석했으며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식에 참석했다. 이후 그는 민주연맹 중앙 부주석, 중앙인민정부 정무위원, 산림공업부장, 전국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전인대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정치생명을 잃어버린다.

2.4. 몰락

1956년 4월25일에 열린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 공산당 주석은 "10대 논제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여 지식인들의 자유발언을 허용하는 문제를 논의했고 4월 28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백화제방(百花齊放),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방침을 제시했다. 마오쩌둥은 예술상에서는 '백화제방', 학술상에서는 '백가쟁명'을 우리의 방침으로 해야 한다며 공식적으로 "쌍백방침"을 제기했다. 이에 1956년 9월 중국 공산당 제8기 전국대표대회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당의 공식 방침으로 정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뤄룽지는 1957년 5월 22일 공산당 중앙 통전부가 주관한 좌담회에서 '평반위원회(平反委員會)의 설립을 요구했다. 즉, 삼반오반운동에서 잘못 처결된 인사들이 명예회복할 수 있도록 위원회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치학과 법학을 서구에서 전공하고 법률에 의해 개인의 인권 보장되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정치 활동을 해왔던 뤄룽지로서는 당연한 발언이었지만, 공산당으로서는 지금까지 행해왔던 사상개조운동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여겨질 수 있는 발언이었다.

1957년 6월, 마오쩌둥과 중공은 반우파 투쟁을 전개했다. 이때 뤄룽지는 장보쥔(章伯钧)과 함께 제1호 대우파로 분류되어 '장-라 연맹'으로 불렸다. 이후 그는 '뤼뤙지 규탄대회'에 끌려가 모진 비난을 받았고 그가 속했던 민주연맹, 삼림공업부, 외교학회 등 모든 단체의 동료, 부하, 비서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10년간 그와 동거해온 연인 푸시슈(浦熙修) 마저 그를 "양가죽을 걸친 늑대"라고 비난하며 관계를 단절했다. 결국 1957년 겨울 뤄룽지는 자아비판하며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모주석과 당 지도부, 그리고 수만의 (민주)동맹동지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나 자신을 철저히 개조하고 싶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중국인민과 사회주의 사업을 위해 정직하게 일하고 싶다."

1958년 1월 26일, 민주연맹 중앙위원회는 뤄룽지의 중앙 부주석 지위를 박탈한다고 발표했고 31일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자격을 박탈했다. 또한 그는 산림공업부장직에서도 물러나야 했다.이후 뤄룽지는 우파 수괴라는 낙인이 찍힌 채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반공 비밀 조직으로부터 홍콩으로 망명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여전히 베이징에 남았다.

뤄룽지는 정치생명이 끝장난 뒤 간호사와 비서 몇명만 데리고 베이징 동안시장 옆의 사합원에 거주했다. 그를 모시는 이는 경호원 2명, 기사 1명, 요리사1명, 비서 1명 간호사 1명으로, 저우언라이가 옛 정과 중일전쟁 때 민족의 투쟁 의지를 끌어올린 공을 고려해 특별히 배치해준 것이었다. 간호사는 매일 오전 8시에 도착해 뤄룽지에게 인슐린 주사를 놓아줬다.

그러던 1965년 12월 7일, 간호사는 평소처럼 뤄룽지의 침실 문을 노크했다. 하지만 방 안에서 "들어오세요."라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몇번이나 문을 두드렸으나 여전히 인기척이 없자, 간호사는 방문을 밀어 젖히고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방안에서 간호사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뤄룽지가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간호사가 전등을 키고 뛰어 들어가보니 마루 위에 몇 개의 질산 글리세린이 흩어져 있었다. 이것은 협심증을 치료하는 구급약으로, 평소 심장이 안 좋았던 뤄룽지가 소지하고 있었다. 뤄룽지는 전날 밤에 급성 심장병이 발병하자 구급약을 복용하려 했지만 힘이 다해 끝내 복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곧 베이징 의대 병원에 실려갔지만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이때 그의 나이 69세였다.

1984년 10월 24일, 중국 민주동맹 중앙위원회는 전국 정치협상회의장 3층 로비에서 뤄룽지 탄생 9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했다. 전국인대 상무회 부위원장이자 민주연맹 중앙 주석 초도남(楚图南)은 뤄룽지의 생애 및 업적을 소개했고, 중국 공산당 서기처의 서기 겸 통전부장 옌밍푸(兼明战)는 뤄룽지의 일생을 회고하며 그의 혁명 공헌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그를 유명한 애국 민주인사이자 정치 활동가로 간주했다. 그러나 뤄룽지는 현재까지 공산당으로부터 우파의 거두이자 반당 음모를 꾸민 반역자로 간주되고 있다.

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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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룽지와 왕여우자(王右家).

뤄룽지는 영국 유학 시절 법학과 학생이자 기독교도이며 화교 거상의 딸인 장순췬(張舜琴)과 사귀었고 1928년에 결혼했다. 그녀는 이듬해에 딸을 낳았으나 1개월 만에 잃었다. 그런데 뤄룽지는 아내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때마침 자신의 동료 쉬즈모에게 이혼당한 장야오이(張幼儀)와 염문을 뿌렸고 얼마 후엔 허베이 출신의 왕여우자(王右家)와 가까워졌다. 결국 장순췬은 1931년 뤄룽지와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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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팡(徐芳)

뤄룽지는 왕여우자와 함께 익세보에서 근무했고 베이징에서 동거했다. 하지만 그는 베이징과 천진을 오가며 여류시인 쉬팡과도 염문을 뿌렸다. 1937년 한해에만 무려 47통의 편지를 쉬팡에게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쉬팡의 부모가 이미 애인이 있는 주제에 자신들의 딸에게 접근하는 그에게 그만 만나라고 경고하는 바람에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쉬팡은 말년에 뤄룽지가 자신에게 보냈던 연애 편지 한 장을 공개하며 나머지 편지들은 분실했다며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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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량(史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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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슈(浦熙修)

뤄룽지는 1938년 왕여우자와 결혼했지만 역시나 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사법부장 스량(史良)과 사귀었다. 충칭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와 스량은 공공연한 연인 관계였다고 한다. 이를 견디지 못한 왕여우자는 1945년 중일전쟁이 끝난 직후 뤄룽지와 이혼했다. 그후 뤄룽지는 스량과 관계를 정리하고 펑더화이의 처형 푸시슈(浦熙修)에게 관심을 돌렸다. 푸시슈는 충칭 신민보의 취재부 주임이었는데, 1946년 1월 정치협상회의 대표 38명을 취재하던 중 뤄룽지에게 홀딱 반했다.

그녀는 얼마 안가서 남편과 이혼하고 뤄룽지와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펑더화이가 결사 반대하는 바람에 성사시키지 못했고 그저 애인 관계로 지내야 했다. 두 사람은 왕푸징(王府井) 인근의 같은 골목에 살았다. 푸시슈가 한국전쟁 취재차 떠나 있던 기간을 빼고 사흘이면 이틀을 만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나 푸시슈는 뤄룽지가 우파의 거두로 몰리자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모든 관계를 끊었다.

뤄룽지는 그밖에도 호강대학 총장 류장언(劉湛恩)의 처 류왕립명(劉王立明), 양미(楊薇), 캉유웨이의 외손녀 나의봉(羅儀鳳) 등 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다. 그러나 정작 결혼하지는 않았고, 자식은 없었다.

4. 저서

  • 뤄룽지는 1928년부터 1931년까지 '신월' 월간지에 정론 22편, 서평 6편, 번역 2편, 일반문 7편을 집필했으며 1931년 한해에만 17편의 번역문을 발표했다.
  • 주요 저작으로는 <인권논집>, <정치논문집>, <방자한 미제의 국무장관 애치슨>, <인권, 법치, 민주>가 있다.

5. 참고 문헌


[1] 일부 기록에는 7월 6일로 기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