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화민국 기찰전구 총사령 중화민국 제3전구 부사령장관 | ||
정체 | 鹿鐘麟 | |
간체 | 鹿钟麟 | |
한국식 독음 | 녹종린 | |
영문 | Lu Chung Lin | |
자 | 瑞伯 (서백) | |
출생 | 1884년 3월 12일 | |
청나라 직례성 정주직례주 | ||
사망 | 1966년 1월 11일 (향년 81세) | |
중화인민공화국 톈진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
학력 | 없음 | |
직업 | 군인, 정치가 | |
최종 계급 | 육군 상장[1] (국민혁명군) |
1. 개요
중화민국의 군인. 국민혁명군 고위 장군으로 북무하였으며, 펑위샹의 오호장군(五虎將軍) 중 한 명이었다.2. 펑위샹의 막하
루중린은 1884년 3월 12일, 하북성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과거 시험에서 수재로 급제하지 못했으며, 이후 러일전쟁의 영향을 받아 붓을 던지고 군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1906년, 그는 신군 제6진 제1혼성협의 병사가 되었다. 1908년, 펑위샹이 조직한 무학연구회에 가입하였고, 1910년, 제6진 제40협 제79표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911년 12월, 혁명파의 난주 기의에 펑위샹을 따라 참가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1912년, 루중린은 우샹정이 여단장을 맡고 있던 제20사 제39여단 제2단의 부영장에 임명되었다. 1915년, 제39여단이 제4혼성여단이 제4혼성여단으로 확대 개편되자, 그 상태로 부영장에 유임되었다. 동년, 위안스카이가 천의를 사천군무독리로 임명하였다. 이때, 펑위샹이 여단장을 맡은 제16혼성여단과 루중린이 속한 제4혼성여단도 그를 따라 사천성으로 들어갔다.같은 해 12월 말,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에 반대하는 호국전쟁이 발발하고, 차이어 등이 이끄는 호국군 제1군이 사천을 공격하자 두 개의 혼성여단은 노주에서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으며, 이때 루중린은 난주 봉기 이후 5년 만에 펑위샹과 재회하여 그의 부하가 되었다. 제4혼성여는 사천 서부에서 호국군 류원펑 부대에게 격파당하고 루중린은 펑위샹의 제16혼성여로 전속되었다. 그러나, 펑위샹은 호국군에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그에 적대하는 천의를 어떻게든 설득하여 생각을 바꾸게 하고자 하였다, 이때 루중린은 펑위샹에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여러 가지 계책을 바쳤다. 결국 1916년 5월, 천의는 전보를 보내 제정에 반대하고 사천 독립을 선언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루중린은 책략을 내며 계책을 보좌했다. 펑위샹의 군은 호국군 제5사로 개편되었고, 루중린은 제5사 제3단의 영장에 임명되었다.
3. 북경정변과 국민군
그해 6월,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자 돤치루이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돤치루이는 펑위샹의 여장 직위를 해임하고, 그의 부하였던 제1단 단장 양귀탕을 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루중린은 군기관과 포병영장 등의 직책을 임명하였다. 1917년 7월, 장쉰이 청 황실 복위를 위해 제후들을 명령하며, 전 청나라 황제 푸이를 옹립하여 복벽을 시도하였다. 제16혼성여의 루중린, 추빈, 장즈장, 리밍중 등은 여장 양귀탕을 오히려 베이징으로 가서 장쉰을 알현하였다. 이에 루중린 등은 쉐두비를 추대하여 펑위샹을 다시 여단으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펑위샹은 랑팡에 도착한 뒤, 그 여단의 전 병력을 이끌고, 전보를 통해 장쉰 토벌을 선포하였다. 1918년 8월, 펑위샹이 호남성 상덕에 주둔하는 호서진수사로 부임하자, 루중린은 포병단 단장으로 임명되었고, 교도대대장으로 역임하여 군 훈련을 담당했다. 이 시기의 루중린은 맡은 훈련 업무는 훗날 펑위샹 군대의 정예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 과정에서 장쯔중과 같은 뛰어난 젋은 장교들이 배출되었다. 1922년, 펑위샹이 하남 독판에 임명되었고, 루중린은 하남 전성 경찰처장에 임명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펑위샹의 성내 행정개혁 특히 치안 면에서 뒷받침했다. 같은 해 10월, 루중린은 펑위샹이 거느리는 제11사 제22여의 여장으로 임명되었다.1924년 8월 제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10월 19일, 루중린은 펑위샹의 명령을 받아 베이징을 기습하여 23일에 베이징을 장악하였는데, 이를 북경정변이라고 한다. 그때 루중린은 작전은 매우 신속하고 질서정연하여, 큰 혼란은 일으키지 않고 수도를 장악했다. 이후 펑위샹이 국민군을 조직하고 총사령 겸 제1군 군장이 되자, 루중린은 제1군 잠편제1사 사장 겸 북경경비사령으로 임명되었다. 경비사령 재임 중, 루중린은 청실선후처리위원회 위원으로 초빙되어 14명의 위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고궁 내 청실 유물의 점검, 유지, 보호 등 여러 방면에서 큰 공헌을 하였고, 그의 청렴함은 대중으로부터 높이 평가받았다. 1924년 11월 5일, 루중린은 펑위샹의 명령에 따라 자금성을 점령하고 자신을 "섭정대총통 황푸의 명령을 받들었다"고 칭하며, 푸이에게 황제의 연호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고, 이틀 안에 짐을 싸서 자금성을 떠나지 않으면 대포로 자금성을 평지로 만들겠다고 명하였다. 어쩔 수 없이 푸이는 자금성을 떠났고, 이후 일본인의 도움으로 천진으로 도피하였다. 이후 돤치루이가 임시집정정부를 세운 뒤, 연말에 쑨원이 베이징으로 협상을 위해 방문했을 때, 펑위샹의 명령으로 루중린이 쑨원의 접대와 경호를 담당했다. 1925년 3월, 쑨원이 베이징에서 서거하자, 루중린은 손중산의 영구를 베이징 서산의 벽운사로 옮기는 일을 도왔다. 그해 11월 13일부터 15일까지 천진에서 열린 반봉전쟁 휴전협상에는 류루셴, 장수성 등과 함께 국민군 대표로 참가했다.
4. 북방에서의 격돌
1926년 1월, 펑위샹은 적화되었다는 비판과 의혹을 받아 견디지 못한 펑위샹이 하야를 선언하였다. 그의 부하였던 장즈장이 국민군 전군총사령, 루중린이 국민군 전선총사령[2]으로 임명되었다. 4월, 돤치루이와 봉천파 사이의 밀약이 폭로되자 9일, 루중린은 돤치루이를 축출하여 실각시키고, 차오쿤을 석방하였다. 이 여파로 직봉풍전쟁이 발발, 국민군이 베이징 전투에서 대패하고 그 후 국민군은 베이징에서 철수해, 남구로 거점을 옮겼다. 루중린, 장즈장 그리고 서로총사령 쑹저위안 등은 직계, 노계, 봉계 연합군과 대치하였다. 8월 14일, 우페이푸와 장쭤린의 연합으로 인하여 전황이 불리하자 국민군은 남구를 포기하고 쑤이위안, 바오터우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펑위샹은 소련 외유 중으로 국내에 없었고, 북방 각 세력은 모두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장즈장, 루중린, 쑹저위안의 분투 덕분에 국민군은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이후 9월 17일, 펑위샹이 귀국해 오원에서 선서식을 거행하고 국민연군 총사령이 되어 국민당에 입당하자, 루중린은 총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루중린은 펑위샹의 명을 받아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을 면회하고, 소련의 물질적, 군사적 지원을 확보했다. 1927년 4월 귀국한 후, 루중린은 하남성 민정청장 겸 대리 성정부 주석이 되었다. 동년 9월에는 펑위샹이 이끄는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 제9방면군 총지휘관이 되어 국민정부의 북벌에 참전하고, 직로연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헌했다. 이후에도 루중린은 우로총지휘, 북로총사령 등을 역임하여 북벌 작전을 계속 수행하였다. 이윽고, 1928년 말, 국민혁명이 완수되자, 루중린은 국민정부 군정부 상무차장으로 임명되었다.
5. 중원대전 및 그 이후의 행적
펑위샹과 장제스 간의 모순이 격화되면서 반장전쟁이 시작되었고, 루중린이 이에 가담하였다. 1930년, 중원대전에서 반장연합군이 패배하자, 루중린은 전보를 통해 하야를 선언하고 천진에서 은거하였다. 풍옥상의 유력 부하들이 차례로 등을 돌리는 와중에도, 녹종린은 끝까지 풍옥상에게 충성을 지킨 부하로 남았다.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발하자, 국민정부는 1937년 8월, 하북 및 찰합이 방면 방어를 위해 기찰전구를 임시 전구로 설치하면서 루중린을 기찰전구 총사령에 임명하였다. 루중린은 쑹저위안의 제29군 군단 및 제1집단군과 협력하였다. 그러나 동년에 화북전역의 전황이 악화되면서, 기찰전구는 제1전구 및 제3전구에 흡수 통합되었고, 이에 펑위샹이 제3전구 사령장관으로 임명되고 루중린은 제3전구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펑위샹이 제6전구 사령장관으로 전임되자, 루중린도 그 전구의 부사령장관으로 전임되었다. 1938년, 그는 하북성 주석으로 임명되어 기찰 지역의 적후방 항전을 주관하였다. 이 시기, 루중린은 여러 차례 부대를 이끌고 팔로군과 충돌하였다. 1940년, 장제스와 중국공산당의 노선이 대립하자, 루중린은 사직하고 중경으로 떠났다. 1944년, 그는 병역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6년 7월 31일, 국민정부는 명령을 내려 육군 상장 계급의 루중린을 예비역으로 전역시켰다.[3] 그는 이어 화북선무사 겸 하북성 주석 대리로 전임되었다. 퇴역 후에는 천진에서 은거하였다. 1948년, 펑위샹이 사망하고, 이듬해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루중린은 중국 대륙에 남았다. 그 후 그는 천진의 의생리 가도판사처에서 근무하였다. 1954년, 명예직인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베이징에서 부임하지 않고 천진에 계속 머물렀다. 1966년 1월 11일, 루중린은 천진에서 암으로 병사하였다.6. 평가
루중린은 중일전쟁 시기 하북과 찰합이 지역에서 철도 파괴 및 수송 저지 작전에 책임을 지고, 중앙정부의 명령 하에 '기찰 지역의 정부 명령 통일을 유지'(‘維護華北政令統一') 임무를 수행한 기찰전구 군정·행정 책임자로 자주 언급된다.[4]7. 참고문헌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1993.9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2015.2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2017.1
- 단재의 아나키즘과 중국, 그리고 문학, 이천주, 2009.1
- 中日戰爭時期(1937-1945) 國民政府軍의 對日軍事戰略 變化 硏究, 기세찬, 2010.2
- 국민정부의 항일유격전에 관한 연구, 기세찬, 2014.1
- 중일전쟁시기 국민정부의 전시동원에 관한 연구, 사총, 2015.1
- 신해혁명 이후 일본 언론의 선통제 관련 보도 경향: 1912–1924, 정세련, 2023.4
- 만주사변시기 중국 관영언론의 인식과 대응—〈중앙일보〉를 중심으로, 이재령, 20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