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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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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Joseph de Bourbon, Duke of Vendôme(1654.7.1 ~ 1712.6.11)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2.3. 사망
3. 결혼 생활

1. 개요

17, 18세기 프랑스의 명장. 제3대 방돔 공작이자 프랑스 원수로서 9년 전쟁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기간 활약했다. 사부아 공자 외젠의 최고의 라이벌로 평가받는 인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싸인 프랑스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조제프는 1654년 7월 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와 정부 가브리엘 데스트릐의 증손자인 방돔 공작 루이 2세의 아들이었고, 그의 어머니 로르 망시의 친언니 올랭피아 망시니는 외젠 드 보아르네의 어머니였다. 조제프는 증조부인 메르세투르 드 팡티에브르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고 1669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방돔 공작이 되었다.

조제프는 18살때 군대에 입대했고 곧 자신의 활력과 용기를 발휘해 대 네덜란드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 1688년 34세에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또한 9년 전쟁 시기 스텐케르크 전투에서 뤽상부르 공작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 휘하에서 활약했고 마르사그리아 전투에서는 니콜라 카티나 휘하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선보였다. 1695년엔 카탈루냐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프랑스군을 지휘했으나 1697년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군에게 패배해 포로 신세가 되기도 했다가 얼마 후 표로 교환 형식으로 석방되었다.

2.2.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잉글랜드, 네덜란드 공화국은 대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를 향한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1701년 7월, 외젠 드 보아르네는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북이탈리아의 밀라노 공국을 공격했다. 이때 밀라노 공국 수비를 맡았던 니콜라 카티나 장군은 외젠의 교묘한 군사 이동에 현혹되어 후방으로 퇴각했다. 루이 14세는 니콜라 카티나의 소극적인 행동에 분노해 발레루아 공작 프랑수아 드 뇌빌을 파견해 군대 지휘권을 맡겼다. 그러나 발레루아 공작은 카티나의 만류를 뿌리치고 적극적인 공세를 개시했다가 그해 9월 1일 키아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패배했고 1702년 2월 크레모나를 기습 공격한 외젠에게 대패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발레루아 공작이 포로가 되어버렸다는 소식을 접한 루이 14세는 조제프를 북이탈리아로 파견했다. 1702년 여름 외젠이 만토바를 공격하고 있을 때, 조제프는 포강 동쪽의 구아스탈라를 점령한 후 포강 북쪽의 보르고포레트로 향했다. 이에 외젠은 만토바 공격을 중단하고 조제프를 상대하기 위해 진군했다. 1702년 8월 15일, 외젠은 루차라 근처에 방어 진지를 구축한 조제프의 프랑스군을 공격했다.이렇게 해서 벌어진 루차라 전투에서, 외젠은 시종일관 공세를 퍼부었지만 조제프의 철저한 방어 전술로 인해 방어 진지를 공략하지 못했다. 이후 북이탈리아 전선은 1702년 겨울까지 고착 상태가 되었다.

1703년, 외젠은 빈으로 진격하는 프랑스군을 저지하기 위해 독일로 이동해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의 잉글랜드군과 합세했다. 조제프는 외젠이 북이탈리아를 떠난 틈을 타 공세를 개시해 외젠에 의해 잃어버렸던 영토 일부를 회복했다. 그런데 1704년 8월 13일, 외젠은 블렌하임 전투에서 존 처칠과 함께 프랑스군을 공격해 18,000명을 전사시키고 13,000명의 포로를 붙잡는 대승을 거뒀다. 이후 외젠은 북이탈리아로 돌아가 밀라노 공국을 향한 공세를 계획했지만 보급품의 부족과 전염병으로 인해 발이 묶였다.

1705년 8월, 외젠은 밀라노 공국을 공격하기 위해 아디제 강 도하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자 조제프는 카사노에서 이를 막아섰고, 곧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루 종일 전개된 카사노 전투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해야 했고 외젠은 중상을 입고 후방 진지로 후송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장남인 요제프 1세가 즉위했다. 이에 외젠은 서둘러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외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조제프는 1706년 4월 칼치나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북이탈리아를 석권했다. 이제 북이탈리아에 남은 오스트리아 세력은 토리노 뿐이었다. 상승 장군이었던 외젠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기고 북이탈리아 내 오스트리아 세력을 축출한 조제프의 명성은 치솟았고, 사람들은 그를 '군인 중의 군인'이라고 칭송했다.

북이탈리아 전선이 이렇듯 우세하게 흘러가고 라인강 전선도 우세하자, 루이 14세는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공격할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1706년 빌레루아 공작 프랑수아 드 뇌빌에게 6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빌레루아 공작은 1706년 5월 23일 라미예 전투에서 존 처칠의 잉글랜드군에게 15,000명의 사상자 및 포로가 발생하는 완벽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처칠은 여세를 몰아 루뱅, 메헬렌, 리르, 헨트, 알스트, 다머, 오우데나르데, 브뤼헤를 차례로 점령한 후 6월 6일 안트베르펜까지 함락시켰다.

이 처참한 소식을 접한 루이 14세는 조제프를 스페인령 네덜란드 전선에 파견해 존 처칠을 저지하게 했다. 조제프는 일전의 대패로 인해 멘붕 상태에 빠진 군대를 최선을 다해 수습했고 방어선을 빠른 시일에 구축해 처칠이 더이상 공세를 가하지 못하게 했다. 1708년, 루이 14세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전선의 총사령관으로 자신의 손자인 부르고뉴 공작 루이를 임명하고 조제프와 함께 존 처칠을 상대하게 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할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진격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부르고뉴 공작과 조제프간의 불화가 불거진 것이다. 조제프는 북이탈리아에서 외젠을 상대로 승전을 거둘 정도로 유능한 장군이었으나 부르고뉴 공작은 그의 의견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부대를 지휘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프랑스군은 진군을 지속하여 7월 5일 오우데나르데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자 존 처칠은 급히 행군하여 오우데나르데에 도착했고, 외젠 역시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그와 합세했다. 7월 11일, 처칠과 외젠은 오우데나르데 근방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적이 예상보다 빠르게 나타난 것에 놀란 조제프는 직접 좌익 부대를 지휘해 전투를 벌였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분전하여 동맹군 우익을 밀어붙이는 데 성공했다. 그는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 후방에서 지켜보고 있던 부르고뉴 공작에게 기병대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부르고뉴 공작은 기병대를 운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하지만 조제프는 부르고뉴 공작이 아무리 자신과 불화를 빚었더라도 자신에게 기병대를 보내줄 것으로 믿고 공세를 이어갔다가 그만 적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그 사이, 외젠과 처칠은 다른 방면의 프랑스군을 몰아붙여 적의 전열을 허물어버렸고, 조제프는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잔여 병력을 수습해 퇴각했다.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15,000명의 사망자와 8천명의 포로가 발생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오우데나르데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괴멸시킨 처칠과 외젠은 1708년 8월 릴을 포위했다. 하지만 릴의 방어를 맡은 부플레르 공작 루이 프랑수아가 잘 버텨줬고, 조제프가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와 합세해 구원군을 이끌고 릴에 진군했다. 그러자 처칠은 외젠에게 릴 포위를 맡기고 자신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 구원군을 특유의 기동전으로 격파했다. 결국 조제프는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릴은 80문에 달하는 공성포의 공격에 시달리고 식량마저 바닥나는 바람에 1708년 12월 항복했다. 릴 요새는 프랑스가 심혈을 기울여 축성한 요새이자 파리를 보호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 곳의 함락은 프랑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뒤 전쟁에 환멸을 느낀 조제프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그러던 1710년 9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가 오스트리아군에게 함락되자, 루이 14세는 조제프를 스페인으로 파견해 스페인군을 재조직하게 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은 비록 마드리드를 공략하긴 했지만 보급난에 시달리면서 1710년 11월에 카탈루냐로 퇴각했다. 이때 오스트리아군 12,000명이 먼저 마드리드를 출발했고, 제임스 스탠호프 장군의 영국군 5천명이 뒤따라갔다. 조제프는 이 기회를 틈타 영국군을 먼저 습격하여 11월 9일 브리우에가에서 영국군을 격파했다. 이후 12월 10일 비야비시오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격돌했는데,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를 내긴 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이 더이상 카탈루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2.3. 사망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종결되기 직전인 1712년 6월 11일, 조제프는 스페인 비나로스에서 급사했다. 향년 58세. 그의 시신은 에스코리알에 매장되었다.

3. 결혼 생활

조제프는 마리 안느 드 부르봉 콩데와 결혼했다. 마리는 콩데 공 앙리 3세 줄 드 부르봉의 막내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앙리 3세는 매우 못생겼다고 알려졌는데 그녀가 아직 결혼하기 전에 사망했다. 1709년에 콩데 공에 오른 그녀의 오빠는 누이가 결혼하는 것을 돕지 못하고 이듬해에 사망했다. 조제프와 마리는 1710년 5월 21일 쏘 성당에서 결혼했다. 이때 조제프는 그의 사촌 펠리페 5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펠리페 5세가 자식이 없이 죽을 경우에 조세프가 스페인의 다음 국왕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혼 2년 째 되던 해인 1712년 조제프는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두 사람 사이의 자식은 없었다. 마리는 조제프의 영지로 돌아갔고, 그녀가 사망했을 때 그 영지는 그녀의 조카인 콩티 공비에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