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 Louis Antoine de Bougainville | |
출생 | 1729년 11월 12일 |
프랑스 왕국 파리 | |
사망 | 1811년 8월 31일 (향년 81세) |
프랑스 제1제국 파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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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봉 왕조 시기의 프랑스 해군 제독이자 탐험가. 7년 전쟁과 미국 독립 전쟁에서 프랑스 해군 소속으로 참전했고, 평화기에는 지구 곳곳을 탐사하며 많은 업적을 쌓은 인물이다.파푸아뉴기니 부건빌 자치 지구와 부겐빌레아[1]라는 꽃이 이 사람의 이름을 따왔다.2. 일생
2.1. 초기 경력
부갱빌은 1729년 11월 11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에서 근무하는 공증인의 아들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의 의향에 따라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군대에 입대하기로 결심하고 변호사를 관둔 후 민병대 장교로 복무했다. 1753년 드래곤 연대로 전출된 그는 이듬해인 1754년에 적분과 관련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논문은 상관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 덕분에 부갱빌은 1755년에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서 런던에 파견되어 왕립 협회의 일원이 되었다.2.2.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한 1756년, 부갱빌은 루이 조제프 드 몽캄의 보좌관으로서 캐나다로 파견되었다. 몽캄은 그의 비상한 지식에 감명받고 그를 자식으로 여기며 호의를 베풀었다. 그해 4월, 부갱빌은 몽캄 장군의 지휘하에 온타리오 호수의 오스위고 요새를 점령하고 파괴하는 데 일조했고 12월에 조지 호수의 윌리엄 헨리 요새를 상대로 한 원정대 지휘를 맡아 500명의 캐나다의 프랑스 거주민과 인디언들을 이끌고 매복해 있다가 영국군을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1757년 여름, 부갱빌은 윌리엄 헨리 요새로 진군하여 6일간 포위 끝에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때 요새 수비군 2200명은 뉴잉글랜드로 안전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장받았지만, 프랑스와 연합한 인디언들은 그들을 공격해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몽캄과 부갱빌은 이들을 통제하려 애썼지만 많은 영국군 장병들이 죽어나가는 걸 막지 못해 거센 비난을 받았다.
1758년 7월, 부갱빌은 몽캄의 지휘하에 키리용 요새에 자리를 잡은 뒤 3,600명의 수비대를 이끌고 제임스 애버크롬비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 15,000명의 공세에 맞서 싸웠다. 7월 8일에 벌어진 카리용 요새 전투에서 영국군은 1,900명의 사상자를 기록하고 조지 호수로 패퇴했다. 프랑스군의 손실은 400명에 불과했으나 부갱빌 역시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이후 부갱빌은 몽캄의 뜻을 받들어 11월에 프랑스 본토에 방문하여 전쟁부 장관에게 추가 병력과 물자를 캐나다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1759년 초 퐁파두르 부인을 찾아가 간청했으나 역시 거부당했다.
그 후 부갱빌은 대령으로 승진해 생 루이스 십자 훈장을 수여받은 뒤 1759년 5월에 300명의 장병과 불충분한 물자를 가지고 캐나다로 돌아왔다. 이후 벌어진 퀘벡 공방전에서, 부갱빌은 1,500명의 병력을 지휘해 영국군이 서쪽에서 퀘벡을 접근하는 걸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9월 13일 제임스 울프 소장이 이끄는 영국군이 아브라함 평원에 극비리에 자리잡는 걸 눈치채지 못했고, 그가 급히 군대를 이끌고 퀘벡으로 달려왔을 때 이미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영국군이 승리를 거두고 몽캄은 전사한 뒤였다. 결국 부갱빌은 몬트리올로 후퇴한 뒤 프랑수아 가스통 드 레비 장군과 함께 몬트리올을 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기울어진 대세를 바꾸지 못하고 1760년 9월 항복했다.
1761년, 부갱빌은 레비와 함께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왔고 1763년 프랑스 육군 장교직을 물러난 뒤 해군에 입대했다.
2.3. 프랑스 최고의 탐험가
7년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정부는 포클랜드 제도의 식민화 계획을 구상했다. 부갱빌은 이 일을 자비를 들여 진행했고 1763년 9월 15일 프리깃함 라에글 호와 슬로프 르 스핀츠 호를 타고 프랑스를 떠났다. 이 탐험에는 자연학자 겸 작가인 앙투안 조세프 페르네티와 기술자 루일리에 드 라 세레르도 포함되어 있었다. 원정대는 1764년 1월 말 프랜치 베이에 도착해 루이 15세의 이름을 딴 루이 항에 상륙했다. 1764년 4월 5일, 포클랜드 제도를 프랑스의 영토로 삼게 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가 개최되었고, 이후 부갱빌은 프랑스로 돌아왔다. 루이 15세는 1764년 9월 12일 공식적으로 포클랜드 제도의 소유를 공표했다.그러나 스페인이 이에 대해 딴지를 걸었다. 스페인은 포클랜드 제도를 소유한 프랑스가 그곳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식민지인 페루를 공격할 후방기지로 삼을 것을 우려했다. 게다가 포클랜드 제도에 거주하는 프랑스인 150명을 지원하기 위해 들어가는 재정 부담이 크자, 프랑스 정부는 부갱빌에게 포클랜드 제도에서 철수하고 섬을 스페인에게 팔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스페인은 50만 프랑을 부갱빌에게 건네주고 포클랜드 제도를 사들였고, 부갱빌은 1767년 1월 31일에 포클랜드 제도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을 본토로 귀환시켰다.
이후 부갱빌은 세계일주 항해에 착수해 1766년 11월 15일 보두쉐(선원 214명)와 에투아일(선원 116명) 2척을 이끌고 낭트 항을 출발했다. 이 항해에는 식물학자 필리베르크 콤메르손[2]도 동승했고, 천문학자 피에르 앙투안 베론, 외과의사 루이 클로드 라포르테, 작가 및 역사학자 루이 앙투안 스탈렛 드 생 제르망도 함께 했다. 또한 이 배에는 여성 외과의사 '잔 바레'도 있었는데, 그녀는 후에 세계를 일주한 최초의 여성으로 기록되었다. [3]
1767년 3월 22일, 부갱빌은 투아모투 군도를 방문했고 4월 2일에 메히티아 섬의 봉우리를 탐사했으며, 뒤이어 오타히티 섬을 방문했다. 사실 이 '오타히티' 섬은 불과 8개월 전에 영국 항해사 사무엘 윌리스가 먼저 발견해 타이티 섬으로 명명했지만, 부갱빌은 프랑스의 명예를 위해 자신이 이 섬의 최초 발견자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의 탐험대는 남 사모아와 뉴헤브리데스로 항해한 후 에스피리투산토 섬을 발견한 뒤 여전히 남 대륙을 찾아 서쪽으로 항해했다. 그러나 6월 4일 하마터면 암초에 부딪칠 뻔한 일을 겪은 뒤 북동쪽으로 항로를 변경하기로 한 그는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를 거의 발견할 뻔했지만 안깝게도 솔로몬 제도를 찾아갔다가 그곳에 거주한 원주민들의 적의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버려서 그러지 못했다.
1768년, 부갱빌은 괴혈병에 고통받고 있는 선원들을 구제하기 위해 몰루카 제도 중 하나인 부루 섬에 정박한 뒤 네덜란드 현지 총독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1768년 9월 동풍을 이용해 바타비아로 항해했다. 이후 그들은 브라질에서 겨울을 보내며 휴식을 취한 뒤 1769년 3월 프랑스 생 말로 항구에 도착했다. 그의 항해 도중 사망한 이는 7명이었다. 이후 부갱빌은 국민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그가 저술한 항해기는 1771년 파리에서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부갱빌은 1772년 루이 15세의 개인 비서로 임명되어 후대를 받았다.
2.4. 미국 독립 전쟁
1779년 프랑수아 조세프 드 그라세 백작의 함대에 배속된 그는 서인도 제도에 파견되어 영국 해군과 몇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그러던 1781년 8월 그라세 제독의 함대와 함께 요크타운 요새에 주둔한 콘윌리스 장군의 영국군 봉쇄에 참가한 그는 9월 5일 체사피크 해전에서 오귀스트 호에 승선하여 프랑스 함대의 선두함대 지휘관으로서 활약했다. 그는 영국 함선 프렌시스 호를 항해 불가 상태로 만들고 테러블 호 역시 반파시켰다. 그 후 10월 19일 콘윌리스 장군이 항복하자, 프랑스 함대는 서인도 제도로 돌아갔다.1782년 4월 12일, 부갱빌은 마르트니크 섬 근처에서 벌어진 상트 해전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오귀스트 호를 지휘한 부갱빌은 패배를 면치 못하게 되자 휘하 8척의 배를 이끌고 생 유스타스 섬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그라세 제독과 부갱빌은 패배의 책임을 묻는 군법 회의에 소환되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 후 1790년, 부갱빌은 해군 장교를 은퇴하고 다시 육군에 가담했다.
2.5. 말년
1792년 8월 10일 봉기로 파리에 거주하던 많은 귀족들이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있을 때, 부갱빌은 기적적으로 파리를 탈출해 노르망디에 있는 그의 사유지에 은거했다. 그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혁명의 광풍이 잦아들자,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경도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1796년, 부갱빌은 프랑스 문화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북극을 향한 탐사 계획을 수립했지만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하자 포기했다.부갱빌은 노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로부터 원로원 의원에 임명되었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 후 말년을 평온하게 보내던 그는 1811년 8월 31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향년 82세.
3. 여담
과거 폴리네시아 프랑 지폐 도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영화 라스트 모히칸에서 몽캄 후작의 보좌관으로 나온다.
[1] 자세한 설명은 부건빌 문서에 있다. 남미가 원산이지만 현재는 부건빌에서도 많이 키운다는 듯.[2] 1768년 항해 도중 브라질에서 발견한 꽃에 부겐베리아(Bougainvillea)라는 학명을 붙인 인물이다.[3] 외과의가 아니라 위에 언급된 식물학자 콤메르손의 비서 겸 가사도우미였으며 내연관계이기도 했다. 건강이 좋지 않던 콤메르손은 바렛을 남장시켜 배에 몰래 승선시켰는데 연구를 위해 가져온 여러 장비들 때문에 가장 큰 선실을 배정 받았기에 선실안에 개인 화장실을 설치하였고 콤메르손의 건강을 이유로 따로 식사를 하는 방법으로 한동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지만 끝내 여성임이 밝혀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