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록키 마르시아노 Rocky Marciano | |
본명 | 록키 프란시스 마르시아노 Rocky Francis Marciano |
출생 | 1923년 9월 1일 |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록턴 | |
사망 | 1969년 8월 31일 (향년 45세) |
미국 아이오와주 뉴턴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복싱선수 |
신체 | 신장 178cm[1], 리치 173cm |
체급 | 헤비급 |
스타일 | 오소독스[2] |
전적 | 49전 49승 (43KO) 무패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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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권투 선수.1952년 9월 23일부터 1956년 4월 27일까지 세계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소유했던 권투선수였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무패 세계 헤비급 챔피언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2000년대에 이르러 플로이드 메이웨더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무패 챔피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무패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였다.
2. 출생 및 초기 생애
마르시아노는 1923년 9월 1일,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브록턴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 아버지 피에르노 마케지아노와 어머니 파스쿠알리나 피치우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자형제로서는 피터와 루이스, 여자형제로서는 앨리스, 콘체타,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18살에 폐렴에 감염되어 거의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젊은 시절엔 야구를 즐겼고, 집에서 만들었던 웨이트 도구들을 이용해 운동으로 몸을 다졌으며, 집 뒷 마당에 있는 나무에 모래를 담은 가방을 매달아 샌드백을 삼아 두드리기도 하는 등 운동을 무척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브록턴 고등학교를 10학년(우리나라의 고1)을 마치고 중퇴. 냉난방 회사에 취직 홈통 배달부로 일했고 도랑파는 작업, 심지어 구두제작공으로까지 일하다가 1943년 2년 복무로 육군에 징집, 웨일스의 스완시에 배속되어 영국 해협과 노르망디까지 선박 보급을 담당하는 보급요원으로 복무한 뒤 1946년 워싱턴 주 포트 루이스에서 군복무를 마쳤다.3. 권투선수로서의 입문과 프로선수로서의 생활
권투는 군복무 시절 당시 제대절차를 밟고 있던 중, 1946년에 있었던 군 아마추어 복싱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는 것으로 아마추어 복서로 시작했으나 1947년 3월 17일, 리 에퍼슨과의 프로복싱 대회에서 도전자로 데뷔, 3라운드 KO승을 올려 잠시 아마추어 리그를 잠시 중단했다가 1948년 3월 골든 글러브 전 동부 챔피언십 토너먼트에서 다시 아마추어 복서로 복귀, 콜리 왈라스를 제압한다. 그 후 올림픽 선수선발전에서 조지 맥기니스를 제압했으나 손을 부상당하고 말았고 이것으로 그의 아마추어 선수생활은 마치게 된다. 1948년 7월 12일 프로선수로 전향을 선언, 해리 빌리자리안에게 승리한 후, 첫 16경기를 5라운드 이전 KO승으로 장식한다. 마르시아노는 3경기를 더 KO승으로 승리하고 테드 로우리와 상대하게 되는데 당시 전문가들은 3내지 4라운드로 로우리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으나 마르시아노가 승리로 경기를 마감지었다. 이후 4경기를 또다시 KO승으로 더했는데 그 중에는 뉴욕주 버팔로 출신의 필 무스카토와의 5라운드 대전에서 승리한 것까지 있었는데 '이름있는' 상대와 대전한 것은 무스카토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3주후 카마인 빈고와의 대전을 갖게 되었고 5라운드 KO승을 거뒀는데 표현을 빌리자면 '반죽음'을 만들어 놓았을 정도였다고.4. 챔피언전과 은퇴
29살의 마르시아노는 도전자로 당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38세의 저지 조 월컷와 상대하게 됐다. 월컷는 챔피언답게 첫 라운드에서 마르시아노를 넘어뜨리는 등 점수를 올려갔다. 그러다 13라운드에서 월컷이 자신의 특유의 필살기를 올릴 준비를 했으나 마르시아노가 응수해 공격으로 몰아붙이면서 왈코트를 KO시켜 마르시아노가 생애 첫 헤비급 챔피언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후 이듬해 첫 방어전으로 월컷을 또다시 상대, 1라운드 KO승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롤랜드 라 스타자와의 두 번째 방어전도 승리,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인 에자드 찰스와의 세번째 방어전도 성공했고 영국과 유럽 통합 챔피언 돈 코크웰을 상대로 한 네번째 방어전 역시 9라운드 KO승으로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마르시아노는 1955년 9월 21일 38세의 아치 무어와 마지막 방어전을 치르게 된다. 원래 전날인 20일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태풍경보로 인해 경기가 취소되어 이날 치르게 된 것. 이 경기에서 그는 2회때 한번 쓰러졌으나 다시 일어나 회복해서 9라운드 KO승으로 방어에 다시 성공한다. 그후 1956년 4월 27일 32세의 이른 나이로 복싱계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평범한 이유였지만, 아무래도 이른 은퇴였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를 둘러싼 각종 루머가 있었다.마르시아노는 1969년 8월 31일, 46번째 생일을 딱 하루 남기고 비행기 사고로 향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여담
- 고등학교 시절에는 야구와 미식축구 선수생활을 했으나 교회 리그에서도 뛰었다는 이유으로 팀에서 퇴출당했는데 고교선수는 타 리그에 참가할 수 없다는 학교규칙을 어겼기 때문.
- 원래 성은 '마르케지아노'였으나 링 아나운서가 그의 성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던 까닭에 지금 알려진 '마르시아노'로 바꾸었다.
-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페이옛트빌에 소재한 시카고 컵스 산하의 마이너리그 팀인 페이옛트빌 컵스에서 삼 주간 선수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 후 팀을 찾지 못하고 다시 브록턴으로 돌아와 권투선수로서의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 선수 시절 브록턴 블록버스터라는 별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의 출생지가 브록턴이란 점과 트레이닝도 브록턴에서 했던 것이 이유인 듯.
- 권투 역사상 최고의 선수중 하나로 꼽히는 조 루이스[3]의 마지막 대전 상대이기도 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5에서 6 1/2점 정도로 조 루이스의 우세를 예상했다. 그러나 마르시아노가 압승하는 이변을 낳았는데 경기 후의 마르시아노는 상당히 착잡한 심정이었다고. 조 루이스는 마르시아노가 우상으로 존경하던 선수였기 때문.
-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는데 이 사고가 상당히 안타까운 것은 조종사였던 글렌 벨즈가 조종미숙이었던 탓이었다. 비행시간이 불과 251시간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과 여러모로 기술부족이었다는 것 때문에 그 안타까움이 더했다. 더구나 마르시아노는 그의 지인의 아들을 위해 연설을 한 후 또 같이 함께 지낸 다음 46번째 생일을 부인과 같이 보내려했는데 그것은 이뤄지지 못했던 것.
- 좀 부풀려졌다는 주장도 있다. 무엇보다 그가 이겼던 상대들이 나이가 들어 한물갔다는 점. 위에 서술했듯이 조 루이스는 록키보다 열살 정도가 나이가 많은 상태였고 사실상 그는 은퇴 후 평범한 일반인의 삶으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아치 무어나 월컷 역시 한 세대 이전 전성기를 누리던 선수였고, 록키가 역전 KO승을 거두었지만 아치 무어나 월컷과의 게임은 록키가 아주 고전했던 경기들이었다. 실제로 록키의 판정승으로 판정된 Roland La Starza와의 1차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록키의 패배라고 생각했기에 판정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다. 하지만, 2차전에서 월컷, 롤랜드 둘 다 록키에게 압도적인 KO패를 당했기 때문에 록키의 실력에 이견은 없다. 또한, 똑같이 무패 세계 챔피언으로 유명한 플로이드 메이웨더와 달리 록키는 세계 챔피언 타이틀 전과 타이틀을 얻고 치른 모든 경기를 KO로 끝내버렸기 때문에 논란은 별로 없는 편이다. 애초에, 전적부터 49전 49승 43KO다. KO율이 무려 88%에 육박한다.
- 유명한 권투 영화 록키 시리즈의 주인공과 상당히 닮았는데 애초에 록키의 제목과 주인공 록키 발보아의 이름은 그에게서 따온 것이다. 영화를 보면 주인공 록키 발보아의 스승인 미키가 록키 마르시아노에게 받은 목걸이를 발보아에게 준다거나, 발보아의 집에 록키 마르시아노의 포스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 "Rocky Marciano", kids.britannica.com[2] 오른팔잡이 격투 스타일을 부르는 것이다. 이와 반대인 왼손잡이 격투 스타일은 사우스포로 불린다.[3] 세계 챔피언 타이틀 25차 방어 신기록 보유자이다. 더 대단한 것은 이 신기록이 80년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