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9 23:58:08

레이 맨시니

파일:Ray_Mancini.png
레이 맨시니
Ray Mancini
<colbgcolor=#000000><colcolor=#aa9872,#8c7a55> 본명 레이먼드 마이클 맨시니
Raymond Michael Mancini
출생 1961년 3월 4일 ([age(1961-03-04)]세)
미국 오하이오주 영스타운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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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
전적
34전 29승(48KO) 5패(3KO)
체급 라이트, 라이트웰터급
신장/리치 164cm / 165cm
스탠스 오서독스
링네임 Boom B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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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적3. 커리어4. 파이팅 스타일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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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권투 선수.

2. 전적

  • 주요 승: 알 포드, 호르헤 모랄레스, 호세 루이스 라미레스, 훌리오 발데스, 아르투로 피리아스, 에르네스토 에스파냐, 김득구, 조지 피니, 올랜도 로메로, 바비 차콘
  • 주요 패: 알렉시스 아르귈리오, 리빙스턴 브램블(2), 엑토르 카마초, 그렉 호건

3. 커리어

어린시절 아버지이자 1940년대 탑랭커 복서였던 레니 맨시니에게서 혹독한 복싱 훈련을 받았다. 레니는 2차세계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입어 하락세를 타 챔피언에 등극하지 못하고 은퇴한 경험이 있어 아들인 레이를 더 혹독하게 가르쳤다. 레이 역시 아버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복싱에 매진했다.

1979년 프로에 데뷔해 20승 무패를 기록했다. 1981년 알렉시스 아르귈리오를 상대로 The Ring, WBC 라이트급 타이틀에 도전했다. 잽과 헤드무브먼트로 파고들어 연타를 여러번 성공시켰으나 아르귈리오의 리치에 고전했고 14라운드 왼손을 맞고 TKO패하며 커리어 첫 패배를 경험했다.

이후 2연승을 거두고 1982년 아르투로 피리아스를 상대로한 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에서 1라운드 TKO승을 거두며 라이트급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2년 11월 1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유명호텔인 시저스 팰리스(Caesars Palace)에서 김득구[1]를 상대로 2차 방어전을 치렀다.

당시 경기상황을 보면 9라운드까지는 맨시니가 유효타는 더 많았어도 호각에 가까운 멋진 승부를 펼쳤지만, 10회 때부터 체력 고갈로 난타를 허용하였다. 그 후 11~13라운드에 걸쳐 계속 수세에 몰리면서도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이 때 허용한 집중타로 사진을 보면 맨시니와 김득구의 눈 주위가 크게 부어올랐다.

파일:김득구 맨시니 14라운드.png

14라운드. 이미 패색이 짙었지만 김득구는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공이 울리자 마자 맨시니에게 다시 달려들어 펀치를 섞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아 유효타를 날릴 수가 없었다. 이후 지칠 대로 지쳐 가드를 완벽하게 올리지 못한 김득구의 왼쪽 머리에 맨시니의 라이트가 강하게 적중했다. 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사진이 바로 이 때 찍힌 장면이다. 이에 놀란 김득구가 뒤로 물러났으나 맨시니의 따라붙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어지는 맨시니의 왼손 훅은 일단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긴 했으나 후속타가 계속 나올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이미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김득구는 가드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스텝도 넓게 밟지 못해 안면을 그대로 노출했고, 달려들던 맨시니가 뻗은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김득구의 턱에 제대로 적중해 버렸다. 김득구는 이 충격만은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다운되고 말았다.

김득구는 필사적으로 로프를 붙잡으며 몸을 일으키고 결국 다시 일어서기까지 했지만 이미 경기 속행은 어려운 상태였다. 이에 심판이 KO를 선언하며 맨시니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맨시니가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는 동안 김득구는 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뇌출혈에 대한 처치와 혈전 제거를 위해 두 시간 반에 걸친 뇌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5일 뒤 당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있었던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산소 마스크를 떼어내고 장기기증을 하면서 26세의 나이로 돌아오지 못할 영면의 길을 떠났다.

맨시니는 이 경기이후 2번더 방어전을 성공하는 등 기량이 바로 하락하지는 않았지만 파이팅스타일이 인앤아웃파이팅으로 변모했다.

1984년 리빙스턴 브램블을 상대로 5차방어전을 치렀으나 14라운드 TKO패하며 타이틀을 뺏겼고 리매치에서도 만장일치 판정패했다. 이후 경기텀이 길어져 4년만인 1989년에 엑토르 카마초를 상대로 WBO 라이트웰터급 타이틀전을 치렀으나 스플릿 판정패했다.

1992년 그렉 호건을 상대로 7라운드 TKO패했고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은퇴이후 원래 자신이 꿈꿨던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주로 영화쪽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0년 자신의 고향인 오하이오주 영스타운에 대한 다큐멘타리를 제작했다. 또한 복싱 해설자로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4. 파이팅 스타일

당시 체급내 최고의 인파이터였다.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하며 잽과 헤드무브먼트로 파고 들어 토투토상황에서 바디-안면 훅 콤비네이션으로 유효타를 꽂는 패턴이였다. 특히 바디샷을 연타로 두들겨 상대의 카디오를 깎아먹고 리드를 가져오기도 했다. 들어오는 상대에게 카운터 어퍼컷또한 잘 맞추는 편이였다.

단점은 화끈한 타격전을 선호하던 편이라 연타시 가드가 내려가 있어 본인도 정타를 꽤 많이 허용하는 편이였다. 피리아스와의 타이틀전에서도 초반 연타로 두들기다가 피리아스의 체크훅에 맞아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김득구전이후 난전에 의존하는 패턴을 줄이고 우수한 잽과 풋워크를 활용한 인앤아웃파이터로 변모했다. 하지만 자신보다 리치가 긴 선수들과 잽싸움하는데 고전했으며 상대의 잽을 패리하거나 하이가드로 방어하는 능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였기에 이후 하락세가 빠르게 찾아왔다.

5. 여담

미식축구 코치인 밥 스툽스와 절친이다.

링네임인 Boom Boom은 자신의 아버지인 레니의 링네임을 물려받은 것이다.

형인 레니 맨시니 주니어도 복싱선수였으나 1981년 사망했다.

김득구와의 시합은 레이 맨시니에게 있어 평생 씻어내지 못할 상처로 남았는데 레이 맨시니는 김득구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으로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김득구와의 경기 이후에도 계속 복싱 선수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득구 사망 사건이 맨시니의 선수 생활에 큰 타격을 가했다는 점은 틀림없다. 

2011년이 되어서야 맨시니는 김득구의 유족과 만남을 가졌는데,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맨시니와 한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온 맨시니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김득구의 아들에게 이제야 오랜 세월동안 가졌던 마음속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겠다고 한 맨시니의 말은 많은 올드 복싱팬의 심금을 울렸다. 맨시니는 매년 복서를 꿈꾸다 세상을 떠난 형의 기일과 김득구의 기일에는 빼놓지 않고 조의를 표한다고 한다.


[1] 김득구는 전적은 괜찮았지만 세계무대 경력이 없어 세계 복싱계에선 무명인 선수였는데 WBA 세계랭킹 1위가 되고 동급 최강으로 평가받는 챔피언과 매치업이 이루어진 부분을 이상하게 보는 시각이 많다. 원인은 프로모터 밥 애럼(Bob Arum)의 농간 때문이었다. 김득구는 세계적인 강자들과 싸울만한 기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복싱계의 일관된 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