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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pold von Schweinspeunt | ||
생몰년도 | 미상 ~ 1221년 이후 | |
출생지 | 슈베인스페운트 | |
사망지 | 미상 | |
재위 기간 | 1197년 - 1218년(아세라 백작) 1210년 - 1218년(스폴레토 공작) |
1. 개요
스폴레토 공국 61대 공작, 아케라 백작.2. 행적
슈베인스페운트(Schweinspeunt) 출신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대대로 섬기는 장관 가문의 일원이었다. 119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와 함께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로 진군하여 구기에르무 3세를 폐위시키고 시칠리아 왕국을 손아귀에 넣는데 일조했다. 하인리히 6세가 독일로 귀환하던 중 테라 디 라보로를 지나갈 때 후방 경비대를 맡았다. 이후 테라 디 라보로 일대의 관리를 맡았으며, 1197년 아세라 백작 리카르도 다퀴노를 체포한 뒤 아세라 백작의 칭호를 얻었다. 1199년 리카르도 디 폰디 백작의 딸과 카이아초의 영주인 동생 지크프리트의 결혼을 주선했으며, 딸 아델기시아를 카세타 백작 로베르토와 결혼시켰고, 외아들 콘라트를 메르시 백작 피에트로 베라르디의 딸인 스테파니아 베라르디와 결혼시켰다.1197년 9월 28일 하인리히 6세가 급사한 뒤 쿠스탄차 1세가 섭정을 맡았지만, 1198년 11월 중병에 걸려 죽을 날이 머지 않다는 게 분명해지자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성장할 때까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맡기기로 했다. 교황은 1201년 아풀리아 공작이자 레체의 백작이며 타란토 공인 브리엔의 고티에 3세를 자신의 성기사로 삼아 시칠리아 왕국을 감독하게 했다. 이에 디에폴트는 자신이 섭정을 맡아야 한다며 반기를 들었다.
고티에 3세는 즉시 테아노 카푸아, 베나프로를 공격해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디에폴토를 사르노로 몰아넣었다. 1202년 10월 6일, 디에폴트는 칸나이 인근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해봤지만 격퇴되었다. 1204년 전열을 재정비한 디에폴트는 고티에 3세를 다시 공격하여 살레르노의 테라스나 성에서 포위했다. 고티에 3세는 이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상실했지만, 포위망을 돌파하고 디에폴트를 몰아냈다. 고티에 3세는 사르노로 피신한 디에폴트를 추격하여 성을 포위했지만, 1205년 6월 11일 매복에 걸려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된 뒤 요새 안으로 끌려갔다. 디에폴트는 치료해주는 대가로 항복하라고 요구했지만, 고티에 3세는 이를 끝까지 거부하고 그해 6월 14일에 사망했다.
1206년, 디에폴트는 프리드리히 2세의 섭정을 맡은 카파로네의 빌헬름을 설득해 프리드리히 2세를 동맹자인 팔레아리아의 발터에게 넘기게 했다. 이후 시칠리아의 섭정에 등극했으나, 1207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자신을 파문하자 교황에게 탄원하기 위해 로마로 가다가 카파로네의 빌헬름에게 체포되었다. 디에폴트는 감옥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뒤 살레르노로 도망친 후 카파로네의 빌헬름과 팔레아리아의 발터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빌헬름과 발터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그들을 몰아낸 후 시칠리아의 섭정으로 군림했다.
1209년 2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로부터 "마기스테르 카피타네우스 토티우스 아풀리에 에트 테레 라보리스(magister capitaneus totius Apuliae et Terre laboris: 아풀리아와 테레의 대리인)"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오토 4세의 지지자를 자처했으나, 1218년 제위를 오토 4세로부터 되찾은 프리듸리히 2세에 의해 체포되어 독일로 끌려가 옥고를 치렀다. 1221년 풀려난 뒤 튜튼 기사단에 가담했으며,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