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9 04:58:55

돈오돈수


1. 개요2. 상세3. 시사점4. 기타

1. 개요

불교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란 단박에 깨쳐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를 이르는 말. 한마디로 더 이상의 수행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깨달음이 진정한 해탈(解脫)의 경지라는 뜻이다. 깨닫고도 계속해서 수행을 해야만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이념과 반대되는 말.

2. 상세

돈오돈수의 주장은 깨닫고도 수행을 더 해야 한다면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1]으로, 성철이 주장하여 과거 불교계에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성철이 법문에서 "마당에 잘라내버려야 할 나무가 있다." 말한 적이 있는데 바로 돈오점수를 가리킨다. 우리나라 불교 교단은 조계종 중심으로, 조계종을 개창한 지눌국사가 바로 돈오점수를 주장한 일의 영향이 큰 듯하다. 성철 스님은 심지어 "지눌은 마구니"라고 표현했다. 게다가 지눌을 이토록 공격한 성철 스님이 바로 지눌 국사를 개창자로 받드는 조계종 종정이기도 했다.[2]

흔히 "깨달음도 인생 한방이냐"는 오해를 사고 있지만 간격이 막대하게 큰 계단식 성장일 뿐이지 우연과는 전혀 무관하다. 선종의 제6대 조사 혜능은 돈오법이 근기가 높은 사람에게 맞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다. 미리 수행해 놓은 기반이 있기 때문에 조금만 일깨워 주면 한순간에 깨닫게 된다는 것. 그리고 성철 스님이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아직 더 수행할 무언가가 남아있다면 그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라는 것이며, 이에 따라 어설프게 자신이 뭔가 깨우쳤다고 착각하거나 자만하지 말고.[3]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끊임없이 수행하고 참선하라는 것. 문제는 불교 전기를 보면 돈오돈수파와 돈오점수파가 갈리고, 깨달은 뒤에 한 번 더 깨달았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많다는 것.[4] 미묘하다.

3. 시사점

불교 철학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논쟁으로, 심지어 불교계 정통이 누구냐에 대한 논쟁으로도 이어진다. 지눌의 돈오점수에 대항하여 돈오돈수를 주장하였던 인물인 고려시대의 원종국사 태고 보우[5]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정통 문제는 보우와 지눌의 대립이다. 역사적으로 이 둘의 지위는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결국 지눌로 굳어졌다. 하지만 태고 보우의 직통을 주장하는 태고종의 인지도는 조계종에 비하면 떨어진다. 물론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내세우며 탄생한 조계종도 지눌과 함께 보우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조계종의 공식적인 입장은 분명히 지눌 쪽 주장에 가깝다.

이러한 깨달음의 대표주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원효가 있다. 수행하러 당나라로 가다가 해골물 한 방에 더 이상의 수행은 무의미할 만큼 정점을 찍고 깨달았다. 선종 계통의 본래 교리가 바로 돈오돈수이기도 하고. 그러나 원효 당대에는 아직 신라에 선종이 전래되지 않았고,[6] 깨달음을 얻은 이후로는 소성거사를 자처하며 염불 수행을 중시하는 정토종을 전파했고[7] 더불어 교종인 화엄종의 사상을 많이 연구했다.

태고 보우는 중국 선종의 직통 중 임제종으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일부러 중국 임제종 고승을 찾아가서 깨달음을 인가받았을 정도다. 이 때문에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은 임제종의 직통을 자처하고, 조계종에서 최상승 수행법으로 보는 간화선도 임제종의 수행법이다.

이 문제는 한국 불교계에서 예민한 문제인 법맥 문제와도 직결되었다. 성철 스님은 중국 임제종에서 인가를 받아온 태고 보우가 한국 불교의 가장 정통 법맥이며, 지눌은 단지 방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돈오돈수/돈오점수 논쟁과 법맥 문제는 성철 스님 사후에도 한국 불교계에서 승려간, 학자간 예민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는 태고종과 조계종이 대립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4. 기타

  • 무협지에서 가끔 고수라는 인간들이 뭔 단어 하나 듣고 더 갈 수 없는 경지까지 올라가는 이유가 괜히 있는 게 아니라, 이 개념 덕분에 생긴 것이다.

[1] 깨닫는다는 것은 자아관념 등의 잘못된 관념을 올바로 통찰해서 그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뜻인데, 계속 수행이 필요하다면 아직 몽상이나 잘못된 견해가 남아있고 거기에 집착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단, 올바른 통찰이 일어났더라도 이전까지 살면서 쌓아온 습관 등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를 올바른 습관과 행으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수행이 필요하다고 보는 선사들도 있고, 이로 인해 논쟁이 일어나는 것.[2] 기독교식으로 비유하자면, 천주교의 수장인 교황이 초대 교황이자 예수의 수제자인 성 베드로 사도를 이단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3] 불교에서 이렇게 어설프게 깨우친 것은 지해(知解)라고 해서 진정한 깨달음으로 가는 것을 막는 큰 장애물으로 본다.[4] 성철 스님도 '나 깨달았소.' 하면서 찾아오는 사람을 끊임없이 상대했을 정도다. 대부분은 성철 스님과 대화 후 자신이 아직 깨달은 게 아님을 깨닫고(...) 돌아가지만, 소란을 피우거나 성철 스님을 비방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어서 아주 골머리를 앓았다. 무엇보다 성철은 저렇게 잘못 깨달은 자들이 대중들을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매우 우려하였다고 한다.[5] 조선 중기 문정왕후 윤씨와의 관계로 유명한 승려 보우와는 다른 사람이다.[6] 원효가 의천과 같이 당나라로 입국을 시도한 해는 650년과 661년인데, 한국에 공식적으로 선종이 들어온 해는 748년이다.[7] 이 때문에 현존 한국 정토종 계열에선 원효를 중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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