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11 04:33:32

도우토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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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로스 왕국 도우토노스 왕조 초대 군주
Дуптун | 도우토노스
제호 한국어 도우토노스
그리스어 Дуптун
라틴어 Doiptounes
별명 필로카이사르 필로로마이오스 에우세베스(Philocaesar Philoromaios Eusebes: 카이사르를 사랑하고 로마를 사랑하며 경건한 자)
생몰 년도 미상 ~ 미상
재위 기간 서기 483년? ~ 미상

1. 개요2. 행적

[clearfix]

1. 개요

보스포로스 왕국 도우토노스 왕조 초대 군주.

2. 행적

파일:도우토노스 비문.jpg

1888년 크림 반도 동부의 케르치 시에서 발견된 비문에 그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에 따르면, 그는 티베리우스-율리우스 왕조의 군주들이 대대로 사용했던 '필로카이사르 필로로마이오스 에우세베스(Philocaesar Philoromaios Eusebes)'라는 호칭을 썼으며, 재상 스파디노스의 감독 하에 탑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비문이 세워진 시기에 대해 여러 추정이 제기되었는데, 비교적 널리 받아들여지는 연대는 티베리우스-율리우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 알려진 레스쿠포리스 5세 시대로부터 한 세기 반이 지난 483년이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보스포로스 왕국의 도시들은 레스쿠포리스 5세가 몰락한 뒤에도 시민들이 삶을 영위했으며 심지어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가 회복되면서 사치품 사용이 늘어났다고 한다. 학계는 고트족이 왕국을 정복한 후 정치적으로 안정되면서 회복되었을 거라 추정한다. 고트족의 지배가 있었다는 것은 4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고트족의 왕으로부터 보스포로스 해협에 새로운 주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서신을 받은 사실에서 확인된다.

469년 훈족이 동고트족과 로마군에게 패배한 뒤, 훈족의 일부였던 우티구르족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크림 반도에 자리잡고 있던 고트족과 전쟁을 벌였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우티구르족은 크림 반도에서 고트족을 크게 격파해 쿠반 지역으로 후퇴시켰다고 한다. '도우토노스'라는 이름은 훈족이 쓰던 이름에서 기원한다고 추정하는 학자들은 그가 훈족 귀족이었으며 이 시기에 보스포로스 해협을 무대로 세력을 형성하여 왕위에 올랐을 거라고 본다. 그런데 이 왕은 티베리우스-율리우스 왕조의 왕들이 사용했던 호칭을 사용했는데,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그가 옛 왕조의 후손이라는 걸 강조하고자 일부러 그 호칭을 썼다는 설을 제기한다. 아마도 동로마 제국과의 교역을 위해 그들에게 친숙한 호칭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통제한 지역은 케르치 반도의 동부와 타만 반도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판티카파에움, 파라고리아 등 보스포로스 왕국의 주요 도시들은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언제까지 통치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