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04:18:24

도밍구스 다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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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밍구스 다기아의 수상 이력
{{{#!folding ▼ 1945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도밍구스 다기아
}}} ||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파일:external/4.bp.blogspot.com/domingos+da+guia02.jpg
이름 도밍구스 다기아
Domingos da Guia
본명 도밍구스 안토니우 다기아
Domingos Antônio da Guia
출생 1912년 11월 19일
브라질 제1공화국 리우데자네이루
사망 2000년 5월 19일 (향년 87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국적
[[브라질|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82cm | 체중 81kg
포지션 센터백
소속팀 방구 AC (1929~1932)
CR 바스쿠 다 가마 (1932)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1933)
CR 바스쿠 다 가마 (1934)
CA 보카 주니어스 (1935~1937)
CR 플라멩구 (1936 / 임대)
CR 플라멩구 (1937~1943)
SC 코린치안스 (1944~1948)
방구 AC (1948)
국가대표 30경기 (브라질 / 1931~1946)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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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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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클럽4.2. 국가대표4.3. 개인

[clearfix]

1. 개요

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

2. 생애

2.1. 어린 시절

도밍구스 다기아는 가난한 농부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도밍구스가 가졌던 축구 선수로서의 재능은 핏줄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의 형제들 중 3명이 축구 선수로서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2] 하지만 그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는 단연 도밍구스였다.

도밍구스 역시 집안이 가난하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섬유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해야 했다.

2.2. 선수 생활

1929년 17세의 나이로 고향팀 방구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때 그는 지역 공중 보건소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이 당시 축구 선수들은 지금처럼 돈을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밍구스의 재능은 빛이 나서 데뷔한 지 2년 만에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 이듬해에는 CR 바스쿠 다 가마를 거쳐 우루과이 리그의 클럽 나시오날로 팀을 옮겼다. 당시 남미 최고의 수비수였던 호세 나사치와 풀백 라인을 구성한 그는 1933년에 우루과이 리그의 우승을 이끌어냈고 그의 플레이에 감탄한 우루과이의 팬들은 요새라 부르며 크게 그를 아꼈다.

1934년에 브라질의 CR 바스쿠 다 가마로 다시 이적하여 히우 지자네이루 주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다시 이듬해에는 아르헨티나CA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하였다. 여기서도 그는 우승을 차지하여 3년간 3개 국가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는 진귀한 기록을 완성해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서 그를 상징하는 별명인 divine master(신성한 마스터)를 받은 것은 덤.

1937년에는 브라질의 CR 플라멩구로 다시 돌아왔고 그는 월드컵에 출전했다. 도밍구스는 처음 출전한 월드컵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였지만 은 항상 똥줄 타는 승리를 챙겼다. 4강전에서 브라질이 이탈리아에 패배하여 결승에는 가지 못했지만 도밍구스는 월드컵 베스트 11 수비수[3]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또한 이탈리아에 대한 편파판정이 자신들의 월드컵을 망쳤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자신의 파울로 인해 만들어진 주세페 메아차페널티 킥으로 인해 팀이 패배했고 그 장면에서 심판이 베니토 무솔리니의 눈치를 보고 파울을 불었다고 강하게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월드컵에서 돌아온 도밍구스는 더욱 완숙한 플레이를 펼쳤고 호세 나사치 이후로 남미 최고의 수비수로 명성을 떨쳤다. 그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월드컵은 중단되었지만 도밍구스는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브라질 대표로 출전하였고 비록 우승하지는 못했지만 1945년 대회에서는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2.3. 이후

1948년 36세의 나이로 은퇴한 도밍구스는 이후 축구에서 손을 떼고 세금 행정쪽의 업무를 보기도 하였으며 그의 아들 아데미르[4]SE 파우메이라스에서 900경기 넘게 출전한 레전드가 되었다. 2000년 도밍구스는 87세의 나이로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레전드 선수들을 살펴 보면 공격수들에 주로 쏠려 있는 브라질에서 처음 나온 제대로 된 수비수. 브라질의 역대 최고 중앙 수비수를 꼽으면 도밍구스의 이름도 흔히 거론된다. 플라카르는 CR 플라멩구 역사상 5명의 위대한 선수에 도밍구스를 선정했으며 IFFHS도 도밍구스를 남미 20세기의 선수 랭킹 43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도밍구스의 커리어의 처음과 마지막 소속팀이었던 방구 AC의 구단가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도밍구스가 특히 유명했던 것은 수비 기술뿐만 아니라 발재간이 좋았다는 것이었다. 비록 그리 빠른 몸놀림을 보여주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 좋은 발재간을 이용하여 단순히 볼을 걷어내는 것보다는 더 안정적인 볼 처리를 선보였던 수비수였다. 그 안정적인 볼 처리를 위해 도밍구스가 오히려 공격수의 방해를 벗겨내는 플레이도 보여줬는데 이런 플레이는 도밍가다(Domingada)라 불렸다.

레오니다스 다시우바와 더불어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명예 멤버이기도 하다.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4.3. 개인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그의 형 중 라지슬라우는 고향팀 방구에 끝까지 남아 215골을 기록. 아직 방구의 역대 최다 득점 선수로 이름이 남아있다.[3] FIFA의 공식 수상은 아니다.[4] 1950년 월드컵 득점왕 아데미르와는 동명이인이다.